정부 “외국인 만기채권액 2배 넘는 상환자금 확보”

  • 입력 2008년 9월 3일 02시 57분


바빠진 외환 딜러2일 달러당 원화 환율이 하루 만에 18원이나 치솟아 3년 10개월 만에 최고치인 1134원으로 장을 마감했다. 환율 급등으로 이날 서울 외환은행 본점 딜링룸은 숨 가쁘게 돌아갔다. 연합뉴스
바빠진 외환 딜러
2일 달러당 원화 환율이 하루 만에 18원이나 치솟아 3년 10개월 만에 최고치인 1134원으로 장을 마감했다. 환율 급등으로 이날 서울 외환은행 본점 딜링룸은 숨 가쁘게 돌아갔다. 연합뉴스
위기설의 숫자 <2> 외국인 보유채권 67억 달러

외국인 채권 만기 9, 10일에 몰려

수익률 높아 일시매도 가능성 낮아

9월 중 만기가 되는 외국인 보유 한국의 국고채 67억 달러(약 7조 원)는 최근 ‘9월 위기설’의 가장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외국인이 보유한 9월 국고채 중 대부분이 9, 10일에 만기가 집중돼 있고, 이들이 한꺼번에 채권을 팔고 나가면 달러 부족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에서 비롯됐다.

외국인들이 증시에서 주식을 대규모로 팔고 나간 상황에서 외국인이 채권까지 팔고 나가 달러가 부족해지면 원-달러 환율이 급등(원화가치는 하락)하고, 물가가 상승하는 등 한국 경제에 연쇄적인 타격을 준다는 것이 위기설의 근거.

하지만 지금처럼 한국 국고채의 수익률이 높아 투자매력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외국인들이 채권을 일부 팔 수는 있어도 일시에 채권을 팔고 나갈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채권시장에서는 압도적이다. 실제로 외국인은 지난달 2조6000억 원의 채권 순매도에서 1조5000억 원의 순매수로 돌아섰다.

설사 외국인이 보유 채권을 모두 팔아도 큰 문제가 없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정부는 “9월에 만기가 돌아오는 국고채 19조 원어치에 대해 상환자금이 이미 확보돼 있다”고 설명했다.



경제 체질 허약해 대내외 악재 터질 때마다 위기설 등장

“시장 과민반응” 분석속 “변동성 줄이는 노력 필요” 지적

■ 위기설의 실체는

경제 위기설은 올해 상반기 국제 유가 급등으로 한 차례 확산됐다가 9월 외국인 보유 만기 채권의 대거 이탈에 대한 우려가 불거지면서 다시 등장했다. 외환위기의 아픈 경험과 약화된 경제의 체질로 악재가 터질 때마다 ‘위기설’에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 ‘위기설’ 진앙은 허약한 경제지표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경제 위기는 한 나라나 지역경제가 예기치 않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변동하는 상황을 뜻한다. 경제학자들은 1970년 이후 세계적으로 100여 차례의 경제 위기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제 위기는 크게 △자국 통화가치가 급락하는 외환위기 △은행 등이 지급 불능 사태에 빠지는 금융위기 △국가가 대외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외채위기로 나뉜다.

한국도 1997년 외환위기, 2004년 신용카드 사태 등의 경제 위기를 경험했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금융 불안으로 신용경색이 심해지자 달러 유동성 부족으로 외환위기를 겪을 수 있다는 ‘위기설’이 등장했다.

외환위기 이후 올해 처음 100억 달러 정도의 적자가 예상되는 데다 7월 자본수지는 1997년 12월 이후 가장 큰 폭인 57억7460만 달러 적자로 나타났다. 달러가 빠져나가고 들어오는 달러는 부족해진 셈이다.

대외채무도 안심할 수는 없다. 8월 말 외환보유액은 다섯 달 연속 감소해 2432억 달러다. 대외채무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외환보유액 대비 유동외채(잔존 만기가 1년 이내 외채) 비율은 지난해 말 75.8%에서 올해 6월 말 86.1%로 증가했다. 대외 채무가 채권보다 많아지는 채무국 전환도 앞두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9월 만기가 다가오는 67억1000만 달러의 외국인 보유 채권이 대거 빠져나갈 수 있다는 ‘금융위기설’이 힘을 받고 있다.

○ ‘경제 악재’가 위기설로 비화

정부와 한은은 물론 대부분의 민간 경제 전문가조차도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의 경제 위기로 당장 치달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현재 상황 정도로 ‘교역조건 악화-경상수지 적자 확대-급격한 외화 유출-외환보유액 소진-외환위기-외채위기’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예단할 수는 없다는 것.

김형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경상수지 적자가 0.8%, 단기외채 비중도 GDP의 18%에 불과해 거시지표로만 볼 때 한국의 경제 위기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정부 측도 이달 만기가 도래하는 약 19조 원의 국고채(외국인 보유 채권 7조 원 포함)와 관련해 “상환자금이 이미 마련돼 국고채 발행 증가는 필요하지 않다”며 “만기가 도래하는 외국인 보유 채권 중 상당수가 재투자될 것”이라고 말했다.

단기외채의 45%가 외국계 은행의 국내지점이 차입한 자금이어서 한국이 책임져야 할 외채로 보기 어렵고, 8월 말 현재 외환보유액도 2432억 달러로 국제통화기금(IMF)이 권고한 적정 외환보유액 기준(약 1400억 달러)보다 많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골드만삭스도 “외환보유액과 관련한 우려가 과장됐다”며 “원화 약세와 금융 긴축정책 영향으로 경상수지는 4분기(10∼12월) 흑자로 돌아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 제2, 제3의 위기설은 반복될 듯

외국인 보유 채권의 만기가 끝나는 이달 10일 이후 ‘9월 위기설’이 일단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내 경제의 허약한 지표가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위기설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박해식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경기 침체, 금융기관의 건전성 등에 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악재가 나올 때마다 위기설이 불거질 것”이라며 “시장의 과민반응이 실제 경제 위기로 연결되지 않도록 정보의 불균형과 시장변동성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외채무와 가계 및 기업대출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등 금융권 부실 가능성에 대해 철저한 감시와 대비가 필요하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이날 “가계부채가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원리금 상환을 못해 주택가격이 폭락하고 은행과 기업이 도산할 가능성은 없다”면서도 “부동산 개발, PF와 연결된 부분은 걱정된다”고 말했다.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는 “유동외채 비율이 지난해 말보다 10%포인트 이상 빠르게 상승한 점이 우려스럽다”며 “불필요한 시장 개입으로 외환보유액을 소진하지 말고 일관된 정책으로 시장의 신뢰를 얻는 정공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닮은듯 유동외채-경상적자 늘고 환율 가파른 상승

다르다 외환보유액 10배… 기업부채비율 4분의 1

■ 외환위기 때와 비교

현재 경제 상황이 1997년 외환위기 때와 닮은 점은 외채 현황, 환율, 경상수지 등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현재 대외채권에서 채무를 뺀 순대외채권은 약 27억 달러로 1999년 말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채권이 점점 줄어들면서 순채무국 전환을 눈앞에 둔 것이다. 1년 이내에 갚아야 하는 유동외채가 늘어나는 것도 외환위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1997년 1월 달러당 840원대로 시작한 환율은 그해 8월 900원대를 돌파했다. 올해 환율도 930원대로 출발한 뒤 가파르게 상승해 2일에는 1134원까지 올랐다. 경상수지는 1994∼97년 4년 연속 적자를 보이며 이 기간에 누적된 적자가 440억 달러나 됐다. 올해 역시 1월부터 7월까지 6월 한 달을 빼놓고는 매달 적자를 보였다. 정부 당국에서 경제 상황에 대해 “문제없다”며 자신감을 보이는 것까지 닮았다.

그러나 제반 여건을 살펴보면 지금 상황을 1997년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우선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재무구조가 눈에 띄게 개선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기업 부채비율은 1997년 424%나 됐지만 올해 1분기에는 92.5%로 떨어졌다.

가용(可用)액이 얼마냐는 논란은 있지만 외환보유액도 올해 8월 말 2432억 달러로 1997년 말 204억 달러의 10배가 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근의 경제 및 금융 불안의 원인이 외환위기 당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 1997년 외환위기는 경상수지 적자 누적과 국내 기업들의 무리한 차입경영 및 해외투자 등으로 발생했지만 지금은 글로벌 신용경색과 유가 및 원자재 가격 급등이라는 해외 요인이 더 크다. 특히 외환위기가 온 직접적인 원인은 외환을 단기 조달, 장기 운용해 온 종금사의 ‘자산-부채 만기 불일치’였으나 지금은 강화된 금융규제로 그런 미스매치가 발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국의 금융시스템이 과거와 다르게 선진화된 것도 제2의 외환위기 가능성을 줄이고 있다. 1997년엔 대기업들의 도산이 곧바로 이들에 돈을 빌려준 은행들의 대출 부실로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은행들의 대출 건전성이 눈에 띄게 개선됐고 기업들은 막대한 유보금을 쌓아 놓고 있어 투자 위축이 우려될 정도다.

그동안 은행들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은 1997년 7.0%에서 지난해 11∼12% 수준으로 높아졌고 고정이하 여신비율도 상당 폭 떨어졌다.

다만 주택담보대출을 중심으로 가계신용이 급증했고 저축은행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의 연체율이 높은 점은 주의해야 할 점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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