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생들의 대학생활]나,미인대회 나간다 왜? 취업 도움되니까

  • 입력 2007년 5월 26일 03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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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 학생회관 취업 정보 게시판의 구인 정보를 학생들이 적고 있다. 청년실업률이 8%에 육박한 시대, 대학은 취업사관학교로 변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25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연세대 학생회관 취업 정보 게시판의 구인 정보를 학생들이 적고 있다. 청년실업률이 8%에 육박한 시대, 대학은 취업사관학교로 변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늙은 팔공(1980년대 학번)’은 ‘젊은 팔공(1980년대생 대학생)’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치열한 이념 논쟁, 담배연기 가득한 술자리, 대책 없는 낭만이 젊음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늙은 팔공들의 캠퍼스는 사라진 지 오래다. 요즘 캠퍼스의 필수 전공 과목은 ‘경력 쌓기’다.

취업의 발판이 될 튀는 경력을 쌓기 위해 명문대 재학생들도 비키니를 입고 미인대회 무대에 오른다.

배낭여행, 봉사여행도 ‘젊은 날의 도전’이 아니라 ‘경력’의 일부다.

눈물 짜는 연애는 ‘쿨’ 하지 않다.

심각하고 복잡하지 않게 하루를 함께할 ‘데이트 친구(Datemate)’를 사귄다.

젊은 팔공들에게 ‘투자’는 필수 부전공 과목이다.

강의실에서 노트북컴퓨터로 주식시황을 살피고 경험 삼아 창업도 한다.

돈에 대해 ‘무관심한 척’ 위선을 떨던 늙은 팔공과 달리 젊은 팔공은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물고기처럼 헤엄친다.

10년 뒤, 한국사회를 이끌어 갈 젊은 팔공들의 세계로 들어가 본다.》

■ 취직에 살고 취직에 죽는 ‘취생취사’

1990년대까지 대학가에서 ‘성년의 날’ 이벤트는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 마시기’, 아니면 단체 미팅이었다.

16일 성균관대 경력개발센터와 취업포털 커리어가 주최한 ‘성년의 날’ 이벤트. 학생들은 주최 측이 남녀 100명 선착순으로 나눠 준 선물을 받고 뛸 듯이 기뻐했다. 선물은 ‘평생취업상품권’이었다.

“취업에 성공하는 그날까지 무료로 취업컨설팅을 받을 수 있잖아요. 이보다 좋은 선물이 어디 있어요.”

대학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도 레닌도 아닌 ‘취업난 돌파’다.

○ 취업사관학교가 된 대학

수원대에서 시간강사를 하는 김모(30·여) 씨는 최근 1학년 학생에게서 ‘약 봉지’를 받았다. 결석한 학생이 출석점수 2점을 사수하기 위해 ‘아팠다’는 것을 증빙하는 자료로 제출한 것.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어서 진단서 대신에 약 봉지를 낸 것이었다.

김 씨는 “요즘 학생은 학점에 민감해 ‘출석은 필수’”라며 “수련회(MT)와 축제를 핑계로 결석하던 1990년대와 달리 출석률이 거의 100%”라고 말했다.

학점에 목숨 거는 건 학생뿐만이 아니다. 연세대 김모 교수는 작년 말 한 학부모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B-’를 받은 아들 성적을 ‘B+’로 올려 달라는 요구였다. 취업난이 심각하다 보니 학부모까지 자식들 학점관리에 나선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대학가에는 방학에도 한가로운 풍경이 없다. 방학 중에도 도서관 자리 잡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올 초 한양대 도서관에서는 재학생과 취업 재수생인 졸업생이 자리를 놓고 멱살잡이까지 벌였다.

지난해 서울대 여름 계절학기 수강생은 7400명을 넘었다. 올해는 계절학기 수강생이 넘쳐 수강권이 20만 원대에 암거래될 정도다.

취업관문의 ‘열쇠’인 영어는 대학가의 공용어가 됐다. 대학캠퍼스가 ‘영어 식민지’가 됐다는 한탄이 나올 정도. 최근 제대한 연세대 복학생 김성환(27) 씨는 23일 연세대 새천년관에서 열린 주한 미국대사 특강에 들어가 여러 번 놀랐다. 통역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학생들끼리 서로 영어로 토론하고 쉬는 시간에도 자유롭게 영어로 대화를 나눴던 것. 이들은 모두 초중등학교 시절 연수 등으로 수년에 걸쳐 외국생활을 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대학의 영어 강의는 대폭 늘어 고려대가 35%를 넘었고 한양대는 2010년까지 20%대로 늘릴 예정이다.

○ 캠퍼스 밖에서 경력관리

서울의 사립 명문대 여학생 A(22) 씨는 지난해 월드미스유니버시티에 출전했다가 깜짝 놀랐다.

참가자 중 명문대 여대생이 상당수였다. 이들은 무대에서 유창한 영어나 제2외국어 실력을 뽐냈다. 꿈은 연예인이나 모델이 아니었다. 아나운서, 기자, 기업인이 되기 위해 무대에 오른 평범한 여대생이었다.

A 씨는 “입사할 때 명문대 학벌만으로는 주목받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초 한 시중은행의 인턴활동을 하며 회사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지원서에 미인대회 경력을 써 넣은 덕분이었다.

부산대 졸업생 김진아(24·여) 씨는 공모전으로 인생역전을 이뤘다. 지방대생에게 ‘하늘의 별 따기’인 대기업에 입사한 것. 2년 전 경영전략 동호회원들과 이 기업의 공모전에 참가해 장려상을 받은 덕이었다.

단순한 해외연수나 여행은 옛 유행이다. 연세대 법학과 박소현(25·여) 씨는 ‘아일랜드의 DJ’가 됐다. 지난해 아일랜드 어학연수 중 국영라디오 방송국에서 한국어와 영어로 매주 각 1시간씩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정슬기 교수는 “요즘 학생들은 학교에서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해외 봉사경험까지 하고 돌아온다”며 “다양한 경험에 적극적”이라고 칭찬했다.

1학년 때부터 온통 취업에만 몰두하는 대학생활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정 교수는 “1990년대까지는 학생들이 수업과제로 지정되지 않은 책도 돌려가며 읽었는데 요즘은 학점 관리에만 급급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강의 중 신문이나 방송에서 현안이 되는 뉴스에 대해 언급하면 다들 ‘그런 일이 있었나’ 하는 표정이라는 것.

그는 “대학생활 중에 지식인으로서 깊이 있게 사회를 고민하는 체험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조은아 기자 achim@donga.com

최우열 기자 dns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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