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가 ‘모피아’ 대신 EPB출신 뜬다

  • 입력 2006년 3월 6일 02시 59분


코멘트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젠 과천(재정경제부)이 아니라 서초동(기획예산처)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삼성그룹 계열사에서 정부부처 공무원을 상대하며 관청 업무를 맡고 있는 한 임원은 2일 4개 부처 개각 명단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옛 경제기획원(EPB) 출신이 포진한 기획예산처 관료들이 고위직에 잇따라 발탁되는 현상을 빗댄 말이었다.

이에 대해 옛 재무부(MOF) 출신들은 금융과 세제 같은 특정 분야에만 해박한 반면 정부정책의 큰 흐름을 잡는 데는 EPB 출신만큼 정통한 관료들이 없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MOF 출신이 현재 주로 포진한 부처는 재정경제부.

EPB 출신들은 권력의 핵심인 청와대와 감사원뿐 아니라 경제부처와 일부 사회부처에까지 퍼져 관료사회의 ‘파워 엘리트’ 역할을 하고 있다.

○청와대와 감사원에도 EPB 출신들

김대중 정권 시절 경제부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전윤철 감사원장은 공정거래위원장과 기획예산처 장관을 거친 EPB 출신.

청와대에서부터 행정부와 지방자치단체까지 감사 영역으로 갖고 있는 감사원장 자리에 경제부처 출신 장관이 발탁된 게 이례적이다. 자신이 몸담았던 재경부, 예산처, 공정위 등 경제부처까지도 감사 대상으로 하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도 있지만 사후 비리 적발보다는 정책감사에 치중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뜻이 반영됐다는 후문이다.

박봉흠 전 대통령정책실장도 기획예산처에서 예산실장을 지내고 차관, 장관으로 올라간 ‘예산통’의 EPB 출신이다. 한때 공정거래위원장 내정설이 나돌기도 한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났지만 5월 말 지방선거 이후 중용될 것이라는 얘기가 많다.

김영주 대통령경제정책수석비서관은 기획예산처 재정기획국장을 지냈으며, 예산처 기획관리실장과 국가보훈처 차장을 지낸 배철호 국회 예산정책처장도 옛 EPB에서 잔뼈가 굵었다.

3·2개각에서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발탁된 노준형 장관 역시 옛 EPB 투자기관1과장을 지내다 정통부로 자리를 옮겼으므로 ‘뿌리’는 기획원이다. 막판까지 노 장관과 경합한 임상규 과학기술혁신본부장도 예산실장을 지낸 예산통.

중소기업청장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발탁된 김성진 장관은 기획예산처 사회예산심의관과 대통령산업정책비서관을 지냈다.

기획예산처에서 재정전략실을 맡았던 변재진 보건복지부 차관은 EPB 출신이 사회부처까지 접수한 사례로 꼽힌다.

이 밖에도 정통부 차관을 지낸 김태현 정보통신연구진흥원장과 박인철 대덕R&D특구이사장도 기획예산처에서 오랫동안 몸담은 ‘EPB맨’이다.

○왜 EPB 출신이 뜰까

EPB 출신의 약진은 옛 EPB의 핵심 인재들이 주로 기획예산처에 포진해 있고 현 정부가 부처 간 재정문제 조정을 중요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과거 부처 이기주의가 강해 ‘모피아’(재무부의 MOF와 ‘마피아’의 합성어)로 불리기까지 한 옛 재무부 출신에 대한 청와대의 불신도 주요 배경으로 꼽힌다.

청와대의 한 386 참모는 “옛 재무부에 뿌리를 둔 재경부 출신들이 퇴임 후 산하기관장으로 낙하산으로 내려가는 데 대해 청와대가 잇달아 제동을 거는 것도 모피아 출신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옛 EPB에서 일한 기획예산처 출신들은 거시 경제적인 안목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하나 노 대통령이 해양부 장관을 지낼 때 기획예산처 관료들의 능력과 파워를 피부로 느끼면서 EPB 출신에 대해 호감을 가졌다는 얘기도 있다.

국장급 이상 공무원들을 출신 부처에 상관없이 하나의 풀로 묶어 인사를 하는 고위공무원단 인사제도가 조만간 도입되면 옛 EPB 출신의 약진 현상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라는 게 관가의 관측이다.

경제부처의 한 국장은 “각 부처의 예산을 짜는 업무는 단순해 보이기도 하지만 부처의 특성과 예산 집행의 문제점을 두루 파악해야 가능하다”면서 “한 푼이라도 더 따내려는 부처 입장에선 기획예산처 출신이 오는 게 유리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