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지배구조]<3>국민은행의 '투명경영' 노력

  • 입력 2003년 7월 20일 17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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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행은 국내에서 가장 선진적인 기업지배구조를 갖춘 기업으로 꼽힌다. 변화의 선봉에는 김정태(金正泰) 행장이 있다. 심지어 ‘지배구조에 목숨 건 사람’이라는 비아냥이 섞인 말을 들을 정도. 그는 왜 지배구조에 그토록 신경 쓰는 걸까.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기업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불투명성을 지적한다. 바꿔 말하면 투명성을 높이면 디스카운트(Discount·기업을 제 가치보다 낮게 평가하는 것)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경영투명성을 높이는 첫걸음이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일이다.”

1998년 옛 주택은행 행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25년을 증권시장에 몸담았던 김 행장. 자본시장에서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지배구조를 개선해 투명성을 높이면 기업가치(또는 주가)를 높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행장 취임 이후 △주주가치 극대화와 △투명경영 정착을 경영목표로 삼아 실천해왔다.

▽이사회의 독립성 강화=국민은행은 경영진으로부터 독립성이 보장된 이사회를 갖추려 애썼다. 현재 이사회 구성원 16명 가운데 12명이 사외이사다. 사외이사의 비율이 높다보니 인수나 합병 등 은행 경영의 중요 안건을 사외이사만으로도 결의할 수 있다.

사외이사의 선출 과정에서도 경영진의 입김을 배제하려 노력했다. 학계인사가 중심이 된 ‘사외이사 추천자문단’이 필요한 사외이사의 2배를 선정해 ‘사외이사 추천위원회’(행장과 3명의 사외이사로 구성)에 보낸다. 추천위가 최종후보 명단을 만들면 주주총회에서 확정된다. 당연히 경영진과 친분이 있는 사외이사가 드물다.

매년초 사외이사를 평가해 제 역할을 못하는 사외이사를 교체하는 것도 특이하다. 해마다 사외이사는 20문항으로 된 자기평가를 하고 동료 사외이사들에 대해 상호평가도 한다. 올 초에 이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하지 않은 사외이사 4명이 물러났다.

사외이사들은 6개로 나눠진 분과위원회에 참석,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상근감사(4명의 사내이사 중 한 사람이다)와 사외이사 3명으로 구성된 감사위원회. 올 1월 경영진이 2년 동안 외부감사를 삼일회계법인에 맡기려 하자 감사위원회는 “비용을 줄이려면 1년 계약한 뒤 내년에 경쟁을 시키는 게 낫다”고 지적했다. 3월에는 컨설팅을 삼일회계법인과 제휴관계인 PWC에 맡기려 하자 “외부감사의 독립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며 KPMG로 바꿔버렸다.

김 행장은 “사외이사가 요구하는 자료는 무엇이든 제공할 뿐 아니라 은행이 비용을 부담하는 전문가를 활용하도록 권장한다”고 말했다. 한 사외이사는 변호사에게 자문을 했다. 올 들어 사외이사의 요청에 따라 은행이 제공한 자료는 154건에 이른다.

▽주주에 대한 정보 공개=주주와 기관투자가에게 직접 정보를 알리는데도 열심이다. 국내 기업 가운데 가장 열심히 기업설명회(IR)를 여는 기업이라는 평가다. 2000년 초 시중은행 가운데 최초로 IR팀을 독립부서로 만들었고 이어 공시 전담팀도 만들었다.

새로운 시도도 주저하지 않는다. 올 6월 5일 오전 10시. 국민은행 홈페이지에선 ‘국민카드와의 합병에 대한 설명회’가 실시간으로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생중계됐다. 1시간여 동안 윤정호 재무담당 대표이사(CFO) 등이 서울 여의도 본점 회의실에 앉아 인터넷을 통해 주주와 기관투자가의 질문에 대답했다. 최규설 IR팀장은 “거래소 등에서 IR를 열면 소액주주들이 참석하기 어려워 웹-캐스팅 방식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주총 현장에서 소액주주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장치도 강화했다. 올 3월부터 모든 안건에 대해 반대의견을 반드시 묻고 변호사를 참석시켜 이를 기록하도록 한 것.

미래에셋증권 한정태 애널리스트는 “국민은행은 충분한 정보제공으로 예측가능하고 믿을 만한 기업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고 말했다.

▽평가와 과제=김 행장은 말한다. “은행의 지배구조에는 외부와 내부에 문제가 있다. 그간 은행 경영을 왜곡해왔던 외풍(外風)은 내 몸으로 막겠다. 나의 전횡은 시스템으로 막자.”

국민은행은 최근 몇 년 동안 국내외 기관의 지배구조 평가에서 1, 2위를 휩쓸었다. 독립된 이사회 운영과 주주권리 보호, 그리고 엄격한 감사위원회 기능 등에서 국내 최고 수준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기업지배구조개선센터 정광선 원장(중앙대 교수·경영학)은 “투명성을 높여 기업 가치를 높이려는 국민은행의 시도는 은행, 주주, 경영진 모두가 ‘윈-윈’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과제도 없지 않다.

우선 경영진의 선출과 평가에 대한 이사회의 참여도가 낮다.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해태제과 차석용(車錫勇) 대표이사는 “현재는 준비된 명단에 찬성 또는 반대 의견을 낼 뿐”이라고 말했다.

국민은행은 16일에도 3명의 부행장(집행간부로 이사회 멤버는 아님)을 전격 경질했지만 이사회에 의견을 묻지 않았다.

대주주인 정부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경영간섭도 논란거리다. 지난해 정부는 가계대출 증가세가 과도하다고 판단, 대출회수를 종용했지만 국민은행은 ‘독립경영’을 주장하며 이를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가계대출은 작년과 올해 은행의 대규모 적자로 돌아왔다. 그러나 대출의 적정성 여부와는 별도로 이는 ‘정부의 행장 흔들기’ 문제로 비화됐고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주주가치 극대화라는 경영철학도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미국에서처럼 적극적인 주가관리를 하면 경영진의 스톡옵션 행사를 유리하게 하는 결과를 빚는다는 우려가 있다는 것. 최근 감사원은 “지난해 김 행장이 자사주 매입기간을 이용해 주식을 판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미국에서는 경영진에 재임기간, 특히 자사주 매입 기간에는 주식을 팔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은행의 지배구조는 기업 의사결정과정에 큰 영향▼

영업사원들의 실적을 수금이 아니라 판매로 평가해 성과급을 지급한다면 그 기업은 크게 고전하게 된다. 외상매출금은 급증하고 이익률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영업사원들은 보너스에 눈이 멀어 신용이 부실한 거래처에 물건을 넘기고 판매를 늘리기 위해서 가격을 지나치게 깎아주기도 할 것이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행동은 사실상 감사원이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공무원의 업무 실적에 대해 최종적으로 평가하고 판정하는 기관이 감사원이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기관의 행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들의 성과를 평가하는 곳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기업들의 경영성과와 재무상태를 평가해 자금을 빌려주거나 회수하는 금융기관은 생산주체인 기업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중요한 존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국내 금융기관들은 정부의 정책 결정에 따라 금융자원을 배급하는 역할을 담당했을 뿐 신용의 평가와 이에 따른 위험관리를 소홀히 했다. 그 결과 외환위기의 ‘주역’이 되는 불명예를 안고 말았다. 물론 이런 결과는 정부와 정치권에도 책임이 있지만 금융기관의 잘못된 지배구조와 의사결정 체계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과거 우리 사회는 상명하복과 상의하달의 수직적 의사결정문화를 갖고 있어 의사결정권한의 독점현상이 심했다. ‘제왕적 대통령’, ‘제왕적 행장’, ‘제왕적 오너’ 등의 말이 일반적으로 통용됐다.

사실 조직이 발전 초기의 단계에 있거나 짧은 기간에 성공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권한의 집중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그러나 성공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경영권의 균형된 행사가 필수적이다.

특히 금융기관 경영의 요체란 눈에 보이지 않은 신용과 위험을 평가하고 관리하는 고난도의 위험관리역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금융기관에서의 대출이나 투자에 대한 의사결정 권한이 한두 사람의 손에 좌우되면 부실대출이나 부실투자가 일어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진다.

기업들이 금융기관의 정당한 평가를 받으려는 노력보다는 의사결정권자의 환심을 사는 데 골몰하게 되기 때문이다. 과거 국내 은행장들은 내부적으로는 제왕적인 전권을 행사했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후원자들의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자금은 기업 활동의 혈액이다. 혈액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건전한 기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당연히 퇴출돼야 할 기업들이 강시가 돼 돌아다니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시장의 규율이 무너지고 경제 전체의 활력이 떨어지는 일이 생긴다. 이런 일들은 외환위기 이전에는 일반적이었고 이후 상당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흡한 부분이 적지 않다.

금융기관의 의사결정 체계에서는 특정인, 특히 최고경영자(CEO)에게 권한이 집중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됐다. 여기에 금융기관 지배구조의 중요성이 있다. 좋은 지배구조란 의사결정권한을 균형 있게 배분해 ‘견제와 균형’이 유지되도록 하는 일이다. 부실기업에 거액이 대출되지 않도록 하고 각종 위험관리를 제대로 하려면 이사회의 감시와 견제활동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사회가 제대로 운용되려면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이사가 반드시 선출돼야 한다.

최근 국민은행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선도은행들이 지배구조의 선진화에 노력을 쏟고 있다. 머지않아 국내 금융기관들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할 것을 기대해본다.

김일섭(金一燮) 이화여자대학교 경영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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