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포석 人事의 세계]삼성그룹 회장 이건희<1>

  • 입력 2003년 6월 24일 18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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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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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인재, 인사를 논하면서 삼성그룹을 빼놓기는 어렵다. 특히 1987년 취임 이후 이건희(李健熙) 그룹 회장이 혼란스러운 시대의 중간 중간 침묵을 깨고 던져온 한마디 한마디는 우리 사회의 ‘인재 지도(地圖)’에 큰 영향을 미쳐온 게 사실이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며 신(新)경영을 주도한 지 올해로 10년, 이 회장은 그룹이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 요즘 핵심 인재 육성을 키워드로 하는 ‘제2의 신경영’을 제창, 다시 변화의 고삐를 죄기 시작했다. 제2 신경영의 핵심이라는 인재 육성은 어떤 의미일까, ‘인재 제일주의’를 주창해 온 삼성의 최고 경영자로서 그는 어떤 인재관을 갖고 있을까. 이 회장은 동아일보 ‘인간포석 인사의 세계―나의 인재 감별법’ 취재팀에 자신의 인사철학과 인재관을 상세히 털어 놓았다. 인터뷰는 기자가 수십 개 문항의 질문을 미리 보내면 이 회장이 용산구 한남동 자택 집무실에서 구술로 답변하고, 그러면 기자가 다시 추가 질문을 보내 답변을 듣는 방식을 반복해서 이뤄졌다. 이 회장은 6월 10일부터 24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모두 8시간을 이번 취재에 할애했다. 언론에 거의 나서지 않는 과묵한 성품의 이 회장이 이처럼 긴 시간 열정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낱낱이 공개한 것은 처음이라고 삼성그룹 관계자들은 놀라워했다. ‘인재’ ‘인사’라는 주제에 이 회장이 얼마나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화를 하나 소개할까요. 늑대가 나타났다고 늘 거짓말을 했던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다들 아시지요. 그런데 이 소년이 나중에 저승에 갔습니다. 염라대왕이 왜 거짓말을 밥 먹듯 했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소년은 ‘너무 심심해서 죽겠더라고요. 이해해 주세요’라며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게다가 ‘내 친구 ○○○는 나보다 훨씬 더 거짓말을 많이 했는데도 사람들이 모르고 있어요’라고 남의 뒷다리 잡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어떤 유형의 직장인을 가장 싫어하느냐”는 질문에 이 회장은 ‘자작(自作)으로 보이는 우화’를 예로 들면서 입을 열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지방의 한 계열사 공장에서 여직원들과 담소하며 걷고 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이 이야기 속에는 인재가 되려는 사람이 금기시해야 할 네 가지가 다 들어 있습니다. 바로 ‘거짓말, 변명,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억지, 뒷다리 잡기’입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의 인물 유형이지요. 직장인으로 성공하려면 이 같은 네 가지 금기 중 어느 하나에도 해당되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이 회장은 사람의 단점보다 장점을 먼저 보려 하고, 그것을 키워주는 타입의 리더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한번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 좌절을 딛고 성공했을 때 이 회장은 전격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아무리 능력 있는 최고경영자(CEO)라 해도 모든 사업에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어요. 그런데 실패했다고 무조건 버리면 인재를 잃는 것입니다. 다른 사업부로 옮기면 더 큰 성공으로 지난번의 실패를 만회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그래서 저는 ‘실패는 자산’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과감하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실수나 실패는 소중한 경험이자 자산이 될 수 있으므로 격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동일한 실패의 반복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한 간부에 대해 이 회장이 쏟는 각별한 애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이기태(李基泰) 삼성전자 사장의 중용이다. 93년 6월 이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간부들을 불러 신경영을 선언하던 당시, 이 사장은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이사였다. 엄청난 위기라며 “일류만이 살아남는다”고 강조하는 이 회장의 말을 듣던 이 이사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당시 불량품을 양산해 내던 단말기 기술 수준을 뼈저리게 자책했던 것.

그러나 94년까지도 불량품은 계속 쏟아졌다. 하루아침에 일류로 도약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좌절은 깊어갔다. 그러나 이 회장은 다시 한번 도전해보라고 격려했다. 격려에 힘을 얻은 삼성전자 무선전화팀은 그동안 만든 단말기를 모두 모아 불태워버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였다.

그 후 ‘애니콜 신화’는 시작됐고 그는 상무이사(96년), 전무이사(98년), 부사장(99년)을 거쳐 2001년에 삼성전자 정보통신 총괄 대표이사 사장이 됐다. 거의 1년에 한 단계씩을 뛰어오르는, 삼성에서도 드문 고속 승진을 거듭한 것.

이처럼 이 회장의 인사철학은 ‘의인불용 용인불의(疑人不用 用人不疑)’로 알려져 있다. 의심나면 쓰지 말고, 일단 쓰기로 마음먹었으면 결코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이 회장이 쓰고 싶어 하는, 갈망하는 인재는 어떤 유형일까.

“바로 천재입니다. 외부에서는 신경영이 질(質)위주 경영이었다면, 제2 신경영은 무엇이냐고 궁금해들 합니다. 그에 대한 답은 바로 나라를 위한 ‘천재 키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재를 그토록 강조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몇 년 전부터 5년, 10년 후 뭘 먹고 살지를 고민해 왔어요. ‘바로 이거다’ 하는 사업이 떠오르질 않더군요. 환경이나 기술이 너무도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미래의 보장된 사업을 지금 찾아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과제였어요.”

이 회장은 며칠씩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우리의 활로를 고민했다고 한다.

“주변 상황을 돌아봤지요. 지금 일본이 불경기라고 해서 우리가 일본을 이겼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일본의 기술력은 아직도 대단합니다. 일본은 정녕 다시 봐야 하는 ‘잠자는 사자’입니다. 중국은 코스트가 우리나라의 10분의 1 수준으로 생산력이 세계 최대지요. 게다가 시장매력 때문에 외국 자본이 투자를 많이 합니다. 우리보다 대학수가 절대적으로 많고 세계 100위권에 드는 대학도 많아요.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한 대학과 인재가 많다는 얘기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공계 비율이 우리는 40% 수준인데, 중국은 60%를 넘어섰습니다. 지도층의 대부분이 이공계 출신이고 연구개발(R&D), 소프트웨어, 연구소 수준까지 앞서고 있어요.”

이 회장은 중국 정부 및 국무원의 이공계 출신 지도부 18명의 인적사항까지 근거로 제시했다.

“이런 추세라면 반도체 액정표시장치(LCD) 무선통신 기술마저 중국에 처질 수가 있어요. 또 중국의 경쟁력은 홍콩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세계 기업들의 아시아 본부가 홍콩에 940개, 싱가포르 200개, 상하이 40개인데 한국에는 단 1개뿐입니다. 기업은 기초적인 사업 인프라가 잘 깔려 있는 곳으로 몰리는 게 당연한데 우리는 이런 기초적인 것조차 안돼 있어요. 파이낸싱, 세금, 영어인력 등 기본적인 것을 어떻게 갖춰야할지 고민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사업을 할 수 있는 기본 여건이 안 된 상태에서 아무리 외국기업에 들어오라고 손짓해도 안 옵니다. 지금 우리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낀 위기상황입니다. 기업 정치 행정 각계의 리더들이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등줄기에 식은땀이 날 겁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뛰어난 인재를 육성해야겠다는 겁니다. 삼성만이 아닌 국가 차원에서 인재를 키우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결국 천재, 우수 인재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국가나 기업이 경쟁에서 이기게 된다는 게 나의 신념”이라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21세기는 경쟁이 극한 수준으로 치달으면서 소수의 창조적 인재가 승패를 좌우하게 되는 거죠. 과거에는 10만명, 20만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앞으로는 천재 한 사람이 10만명, 20만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가 될 겁니다. 총칼이 아닌 사람의 머리로 싸우는 두뇌전쟁의 시대에는 결국 뛰어난 인재, 창조적 인재가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됩니다. 20세기에는 컨베이어 벨트가 제품을 만들었으나 21세기에는 천재급 인력 1명이 제조공정 전체를 대신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반도체 라인 1개를 만들려면 30억달러 정도가 들어가는데 누군가 회로선폭 반만 줄이면 생산성이 높아져 30억달러에 버금가는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천재들을 키워 5년, 10년 후 미래산업에서 선진국과 경쟁해 이기는 방법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디자인 천재, R&D 천재, 설계 천재 등 분야별로 천재급 두뇌를 많이 확보하고 있으면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시장이 어떻게 변하든 두려울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 회장이 말하는 천재는 구체적으로 어떤 부류의 사람일까, 이 회장은 삼성의 누구를 천재급 인재라고 여기고 있을까.이기홍기자 sechepa@donga.com

▼이건희 회장은 ▼

고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창업자의 3남으로 1966년 동양방송에 입사했으며 중앙일보 동양방송 이사 등을 거쳐 78년부터 삼성물산 부회장으로 그룹 경영에 본격 참여했다. 87년 그룹 회장에 취임했고 93년 신(新)경영을 주도해 질 위주의 경영과 인재 등용 정책을 펴 삼성그룹을 세계가 주목하는 기업으로 도약시켰다. 경남 의령군 출생. 61세. 서울대사대부고, 일본 와세다대,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 서울대 명예경영학 박사. 부인 홍라희(洪羅喜) 삼성미술관 관장과의 사이에 1남 3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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