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3년 1월 21일 18시 03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그러자 김씨는 오히려 “은행은 담보물을 자산관리공사에 헐값으로 넘기면서 개인에게는 왜 감면 혜택을 안 주느냐”며 상환을 거부했다.
| ▼관련기사▼ |
대출 당시 경기 성남시 분당에 위치한 60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던 김씨는 경기 용인시 수지에 있는 70평 아파트로 옮기면서 아파트 명의를 다른 사람으로 해놓았다.
A은행은 결국 김씨의 전세금을 가압류했다.
▽“못 갚겠다” 버티는 사람 늘어=개인워크아웃(신용회복지원), 개인파산제도 등으로 채무조정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넓어지면서 돈을 빌려 쓰고 나서 ‘못 갚겠다’고 버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돈을 갚을 능력이 있으면서도 갚지 않는 채무자들의 도덕적 해이(모럴해저드) 현상은 은행 카드 보험 저축은행 등 모든 금융권에서 나타나고 있다.
B은행으로부터 2001년 9월 1000만원을 빌린 자영업자 장모씨(44)는 작년 9월 500만원을 갚은 이후 나머지 대출금을 4개월 동안 연체하고 있다.
장씨는 대출 당시 자신의 명의로 돼 있던 집을 작년 6월 77세의 부친 앞으로 돌려놓고 버티며 B은행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왜 돈을 갚지 않느냐”는 B은행 대출 담당자에게 장씨는 “새 정부가 들어서면 부채탕감도 받을 수 있고 신용불량 사면도 해줄 텐데 뭐 하러 갚느냐”며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하면 그만”이라고 말하더라는 것.
C카드사 관계자는 “개인워크아웃 적격여부가 결정되기까지 3개월 정도가 걸린다는 점을 악용해 상환능력이 충분한데도 ‘워크아웃을 신청할 테니 더 이상 전화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거나 ‘연체금을 깎아주면 워크아웃을 신청하지 않겠다’는 황당한 요구를 하는 채무자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인기 영합 정책은 곤란=금융계 관계자들은 신용회복 정책이 나름대로 필요하긴 하지만 충분한 검토 없이 시행하면 이처럼 숱한 부작용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상환 능력이 있는 채무자마저 안 갚으려 버티는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가 나타난다는 것.
정책의 뿌리가 포퓰리즘(대중 인기 영합주의)에 있다면 부작용은 더욱 커질 것으로 우려된다.
지난해 말 선거 직전 민주당이 ‘2개 이상 금융기관에서 3억원 이하의 빚을 지고 있는 신용불량자로 개인워크아웃을 전면적으로 확대하기로 정부와 합의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선거를 앞둔 ‘선심성 정책’이라는 비난 여론이 들끓자 재정경제부는 ‘민주당과 합의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신용회복지원위원회는 결국 3주일 후 민주당의 발표대로 워크아웃 자격을 확대했다.
금융감독원은 최근 신용카드 연체자 가운데 1개월 이상 장기 연체자가 단기 연체자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늘고 있어 빚을 갚지 않고 버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감원 김병태 팀장은 “개인워크아웃도 결국 장기간 채무를 상환해야 신용불량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며 “채무자들은 빚을 갚지 않고는 신용을 회복할 길이 없다는 사실을 되새겨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통합도산법도 신중히 추진해야=최근 급속히 늘고 있는 개인파산 신청자 가운데 도박과 명품 쇼핑 등을 위해 마구잡이로 돈을 빌려쓴 뒤 법의 관용을 이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역시 도덕적 해이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정부가 파산자의 빚을 없애주고 사회적 지위 등도 복권해 주는 ‘면책’ 조항을 더욱 완화하는 방향으로 통합도산법을 마련 중이어서 부작용이 우려되고 있다.
서울지방법원 파산부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개인 파산신청자가 451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이 가운데 낭비와 도박으로 빚을 진 신청자가 많다는 것.
30대 후반의 주부인 이모씨는 경륜으로 2억원을 날리고 파산을 신청했다. 그러나 이씨는 면책받지 못했다.
신고 당시 이씨의 파산 명분은 ‘가족관계’였지만 법원의 끈질긴 추궁 끝에 경륜으로 돈을 날린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서울 강남에 사는 김모씨(27)는 99년부터 명품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매달 수백만원을 소비하고 이를 10여개의 카드로 돌려 막던 김씨는 결국 카드회사의 전화독촉 때문에 직장마저 그만둬야 했다. 모두 1억4000만원의 빚을 진 그는 최근 법원에 파산을 신청했다.
법원과 금융계는 내년 7월 시행될 예정인 통합도산법이 채무자들의 면책 조항을 폭넓게 적용하는 방향으로 제정되고 있어 채무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더욱 부채질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신용사회 언제 정착되나=거래의 기본은 신용이다. 담보대출 대신 신용으로 대출해주거나 현금 대신 신용카드를 쓸 수 있는 것은 신용을 바탕으로 하는 거래다. 그러나 최근의 신용위기 현상 탓에 우리 사회엔 어렵사리 뿌리를 내려가던 신용질서가 갑자기 붕괴될 위험에 빠졌다.
시중은행의 한 임원은 “선진국에서는 한번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히면 구제되기가 매우 어려워 개개인이 신용을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한다”면서 “요즘처럼 신용불량자를 다소 쉽게 구제하면 신용사회를 정착시키기가 매우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경마-투기-카지노…대박 좇다 쪽박▼
강추위가 몰아치던 1월 초순 서울 명동의 신용회복지원위원회 사무국을 찾은 김모씨(30).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한 김씨는 “채권 금융기관들이 연체이자라도 줄여준다면 몇 년 안에 빚을 갚고 새 출발 할 수 있습니다”라며 사무국 직원에게 구제를 호소했다.

김씨는 은행 카드 저축은행 등 8개 금융회사에 4300만원의 빚을 지고 있는 신용불량자.
3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전자부품 회사에 입사한 김씨는 △3년 안에 결혼 △자격증 2개 취득 △5년 안에 내 집 마련이라는 3가지 목표를 정한 꿈 많은 샐러리맨이었다.
하지만 김씨는 현재 회사로부터 비공식적 사직 권고까지 받은 처지다.
그의 불행은 2001년 하반기에 회사 동료의 주식투자 성공에서 비롯됐다. 회사 동료는 500만원을 투자해 갑절에 가까운 수익을 올렸다. 그는 착실히 모은 1000만원의 여윳돈을 ‘종자’로 2∼3개 종목에 집중 투자했다. 처음 몇 개월간은 수익률이 비교적 괜찮았다.
마침 은행들은 가계담보대출에 이어 개인신용대출을 늘리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정부의 민간소비 확대를 통한 경기부양책이 실시되면서 은행들의 가계담보대출, 신용대출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직장을 가진 김씨가 은행으로부터 돈 빌리기는 식은 죽 먹기였던 것.
김씨는 신용대출 1500만원을 받아 주식에 몽땅 부었다. 하지만 김씨가 산 주식들이 급락하면서 6개월 만에 반 토막 났다.
김씨는 원금을 되찾기 위해 신용카드사를 찾았다. 신용카드사들도 외형 늘리기 경쟁에 돌입한 상황이어서 개인의 신용은 별로 고려하지 않고 마구 대출해 주고 있었다. 김씨는 A신용카드로 150만원, B카드로 100만원, C카드로 100만원 등의 현금서비스를 받아 옵션에 투자했다. 이 돈마저 몽땅 날리자 신용카드 두 개를 새로 발급받았다. 만기가 다가오는 카드대금을 막는 게 급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소위 ‘돌려 막기 전쟁’이 시작됐다. 돌려 막기 하는 도중 상호저축은행 한두 곳에서 200만∼300만원의 소액대출을 받기도 했던 김씨는 신용대출 1500만원에 대한 만기일이 돌아오자 결국 두 손을 들어버렸다. 돌려 막기의 곡예가 한계에 달한 것.
작년 12월 말 현재 30대 이상 신용불량자는 214만1035명으로 전체의 81.2%이고 1000만원 이상 빚을 진 사람은 129만3451명이다. 특히 40대 이상 신용불량자는 138만명에 이른다.
요즘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조모씨(40). 그의 우울증은 2001년 초 시중은행들의 가계대출 경쟁에서 비롯됐다. 당시 은행들은 주택담보대출에 근저당권 설정비 등 각종 부대비용 면제서비스, 이자 감면 등을 제공하며 혈전을 치르고 있었다.
조씨는 낮은 이율로 대출받아 기존의 고리 빚 5000만원을 갚고 나머지 자금으로 주식에 투자하기 위해 살고 있던 서울 강남구 대치동 ○○아파트를 담보로 1억5000만원을 대출받았다.
1억원을 주식과 코스닥에 직접 투자한 조씨는 6개월 사이에 주가하락으로 7000만원을 날렸다. 결국 조씨는 이 아파트를 2억5000만원에 팔고 대출금 1억5000만원을 갚은 다음 전세로 옮겼다. 이때가 2001년 9월. 매도한 아파트는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2002년 7월 4억5000만원까지 상승했다. 결과적으로 조씨는 주식투자에서 7000만원. 아파트매도로 2억원 등 총 2억7000만원의 손실을 입었다.
김씨와 조씨는 그나마 건전한 경우다. C은행의 신용불량자로 등록된 박모씨는 경마로 패가망신한 사례. 신용불량의 원인이 도박일 경우 구제는 거의 어렵다는 게 C은행의 설명이다.
문제는 개인의 신용불량이 금융기관의 신용위기로 이어진다는 것. 지난해 11월 말 현재 전업 카드사와 은행 겸영 카드의 연체금액을 합친 전체 신용카드 연체금액은 9조630억원으로 2001년 6월 말 6조2460억원에 비해 3조원이나 늘어났다. 은행권의 가계대출 연체율도 지난해 12월말 현재 1.5%로 같은 해 6월 말 1.3%에 비해 0.2%포인트나 증가했다.
송기안 은행연합회 신용정보관리팀장은 “20대가 과소비로 신용불량자가 된다면 30, 40대는 한탕주의에 따른 무모한 투기, 경마나 경륜 같은 도박, 빚 보증 등으로 신용불량자가 되는 사례가 많다”며 “자기 능력을 벗어나는 투자나 빚 보증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임규진기자 mhjh22@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