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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2월 27일 16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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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가 지갑을 닫았다. 크리스마스, 연말연시로 흥청망청할 듯한 12월이지만 소비 심리는 꽁꽁 얼어붙고 있다. 상인들은 "외환위기 이후 가장 경기가 나쁘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한숨이다.
▽대형 매장의 썰렁한 연말= 롯데백화점은 1일부터 25일까지 매출액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7.5% 줄었다. 외환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현대, 신세계백화점 등 다른 백화점도 마찬가지다. 신세계 장혜진 과장은 "크리스마스 대목인 24일, 25일 이틀 동안 매출이 지난해에 비해 7% 정도 줄었다"고 말했다.
전년 동기 대비 늘 10% 이상 성장해 온 할인점도 이달 들어 울상이다. 사상 최초로 1∼9%의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고 그 추세가 내년에도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삼성테스코 홈플러스 김영웅 가전담당 바이어는 "그동안 잘 나가던 PDP TV, 김치냉장고 등 가전의 소비도 조금씩 줄고 있다"면서 "카드 손님이 크게 줄었고 6개월 무이자 할부를 해도 지갑을 열지 않는다"고 한숨을 쉬었다.
'소비 위축에도 아랑곳 없다'던 명품도 흔들리고 있다. 프라다 등 노세일(No Sale) 수입 명품 업체들도 이 달부터 20∼30% 세일에 나섰지만 벌이는 신통치 않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10월까지 성장세를 보이던 명품 매장 매출액이 11월 들어 -4%, 12월 -10%로 추락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서민들, 장사 안 돼 못 살겠다= 재래시장, 전자상가, 서울시내 주요 상가는 된서리를 맞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 이대입구의 L미용실 한모실장은 "손님이 절반 수준인데다 퍼머나 염색보다 가격이 싼 커트를 하는 이가 대부분"이라며 "외환위기 때처럼 생머리가 유행할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서울 동대문주차장사업소 한기홍 부장은 "12월 한달 동안 지난해에 비해 주차 대수가 1만5000대 줄었다"며 "1주일에 1번 꼴로 들르던 지방 상인들이 보름이나 한 달에 1번 정도밖에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동대문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진성훈 사장은 "전업을 고려하고 있다"면서 "장사꾼의 의례적 투정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다.
연말 소비 급감은 텅 빈 주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주류도매업체 임성상사의 임석준 사장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전후 사흘동안 신촌 등에 양주 500상자 공급했지만 올해는 400상자도 팔지 못했다"며 "서민들이 즐겨 찾는 생맥주는 40%, 소주는 10% 정도 매출이 줄었다"고 말했다. 27년 동안 서울에서 개인택시를 몬 박병선씨(50)는 "못 벌어도 시간당 1만원 꼴은 벌었으나 요새는 6000∼8000원 수준"이라며 "동료들도 빈차로 돌아다닌다"고 말했다.
▽소비 추락의 원인과 파장= 북한 핵(核)과 이라크 전쟁 위험 등 대외 불안요소, 가계대출 및 무분별한 신용카드 발급에 제동을 건 정부 정책 등이 소비 심리를 짓누르기 때문.
한국은행 정책총괄팀 허진호 차장은 "해외 악재로 인한 주가하락과 정부의 가계신용 축소정책 등이 소비 둔화를 가속화시켰다"면서 "내년 상반기까지는 이런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올 3·4분기(7∼9월) 국내총생산 증가율 5.8%중에 소비가 무려 3.4%포인트를 기여하는 등 소비가 우리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는 것. 이 때문에 소비위축은 경기 둔화의 폭을 더 깊게 할 것이라는 우려가 일부에서 나오고 있다.
LG투자증권 박진 애널리스트 역시 "국내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해외 경기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만큼 내수 부양을 해서라도 경기가 더 하락하는 것을 막아야한다"면서 "부양이라기보다 '견디기'라는 표현이 더 나을 듯하다"고 말했다.
한 국책기관의 전문가는 "최근 정부의 가계대출 억제 정책이 너무 규제 위주여서 신용경색의 우려가 있다"면서 "소비가 급속히 고꾸라지지 않도록 완급을 조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동안 비정상적으로 소비가 경제를 이끌어 온 만큼 소비 둔화는 당연한 현상이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금융연구원 거시경제팀 신용상 연구위원은 "경제를 이끄는 세 축인 소비와 투자, 수출에서 수출이 살아나고 있다"면서 "내년 해외경제가 완만한 회복세를 보인다면 소비 감소로 인한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최근 삼성그룹과 LG그룹이 내년도 설비투자를 늘리기로 하는 등 지지부진하던 투자에도 새로운 기운이 엿보이는 점도 긍정적인 요소로 꼽혔다.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