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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0월 10일 19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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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가라앉는 세계 증시의 늪에 한국 증시도 빠져들고 있다.
미-이라크전쟁 가능성, 브라질 경제위기, 기업실적 둔화, 부동산 거품, 가계대출 부실화 우려 등 국내외 불안 요인이 주가폭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투자자들도 우선 ‘팔고’ 보자는 쪽으로 쏠리고 있다.
주가폭락은 국내 경제운용에도 심각한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전세계의 동시다발적 주가폭락은 1990년대 중반부터 커진 ‘정보기술(IT) 거품(버블)’이 걷히면서 경제침체로 이어지는 측면도 있어 불안감이 더 커진다. 주가하락은 소비를 위축시켜 가뜩이나 공급과잉으로 침체에 빠진 경제의 주름살을 더 깊게 하기 때문.
세계적으로 부동산값이 많이 오른 상황에서 주가하락이 부동산값 하락으로 이어지면 세계적인 디플레이션에 빠질 수도 있다. 자칫 1920년대의 ‘대공황’ 같은 최악의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경고까지 나온다.
▽세계 주가 동반폭락은 시스템 위기〓최근의 주가폭락은 주식시장을 성장 원동력으로 삼아온 미국식 자본주의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란 분석이 있다. 미국은 92년부터 IT가 경제성장을 이끄는 이른바 ‘신경제’가 정착됐다. IT기업이 주가상승에 힘입어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해 설비투자에 나서고, 그 힘으로 주가가 다시 올라가는 ‘선순환’ 고리가 과도하게 작동해 실제가치를 훨씬 웃도는 ‘IT 버블’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2000년 3월 나스닥지수가 급락세로 돌아서자 IT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졌고 전통적인 ‘굴뚝산업’까지 어려움에 처하면서 경제와 증시가 급속히 침체에 빠져들었다. 80년대 말 부동산 담보대출로 만들어진 거품이 꺼지면서 13년째 장기불황에 빠져 있는 일본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것.
한가람투자자문 박경민 사장은 “자본주의 메커니즘의 큰 흐름이 바뀌었다”며 “재정 금융정책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 ‘정책 함정(Policy Trap)’에 빠져 있어 증시와 경기침체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미국 애팔루사자산운용의 전우진 이사도 “기업의 모럴 해저드가 심각하고 ‘9·11테러’ 이후 미국인의 안전에 대한 개념이 바뀌는 등 경제환경이 급변했다”며 “경기순환이란 과거의 이론으로는 현재의 경제와 증시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 해법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주가폭락, 경제운용에 발목〓얼마 전까지만 해도 콜금리 인상 가능성을 내비치던 금융통화위원회가 10일 콜금리를 현 수준(연 4.25%)으로 유지키로 결정한 데는 이날 주가폭락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부동산값 거품과 물가 및 국제수지 불안을 감안하면 금리인상 요인이 있지만 주가폭락 상황에서 금리를 올리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
금리동결과 외국인의 주식매도로 원-달러 환율은 5개월 만에 달러당 1250원대로 급등(원화가치 하락)했다. 이날 3년 만기 회사채 수익률은 5%대로 떨어졌으며(채권가격 상승), 9월중 은행의 수시입출금식 예금은 2조4947억원이나 늘었다.
전세계적 경제환경의 불확실성 때문에 삼성 LG 등 국내 주요 대기업은 내년 경제성장률을 4%대로 낮춰 잡고 설비투자를 줄이는 등 긴축 경영에 나서고 있다.
▽증시 바닥은〓국내 증시의 안정은 미국 증시와 외국인 매도가 언제 어느 수준에서 안정될 것인지에 달려 있다.
하지만 미국 증시는 당분간 더 떨어질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낙관론자인 모건스탠리증권의 바이런 위언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가 700∼740선까지 하락할 것이지만 조만간 상승세로 돌아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줄리우스자산운용의 브렛 갤러허 전무는 “S&P지수가 550∼600까지 추락할 것”으로 내다본다. 9일 S&P지수가 776.76에 마감했으니까 앞으로도 20∼30%는 더 떨어진다는 것.
이 말이 맞다면 다우지수 7,000과 나스닥 1,100선이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이때 한국의 종합주가지수는 550선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추가하락은 매수 기회?〓서강대 국제대학원 조윤제 교수는 “전세계가 팽창적 재정 금융정책을 쓰고 있는데다 한국에서는 주가하락에 따라 소득이 줄어드는 역자산효과가 그다지 크지 않다”며 “최근의 주가하락이 공황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LG증권 박윤수 상무는 “종합주가가 일시적으로 580선 밑으로 떨어질 가능성도 있지만 지나치게 많이 매도한 상태이므로 단기매수를 고려해볼 만하다”고 밝혔다.
홍찬선기자 hcs@donga.com
▼“600마저…”말잃은 투자자▼
서울 여의도 대신증권 객장은 도서관처럼 조용했다. 시세판은 주가하락을 나타내는 녹색으로 가득하고 몇몇 고객만 넋 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종합주가지수 600선이 무너진 10일.
한 40대 투자자는 주가 전망을 묻자 “이제 올라도 그만, 더 빠져도 그만”이라며 고개를 돌렸다.
이날 객장은 ‘자포자기’가 지배했다. “이미 한 달 이상 주가가 바닥을 헤맨 탓에 600선 붕괴가 별 충격을 주지 않는 것 같다”(증권사 객장 직원)고 말했다.
투자자들의 충격은 물밑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속이 탈 뿐 드러내놓고 원망할 곳도 희망도 없어 보였다.
장기증권저축에 가입한 근로자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가 조회한 단말기에는 장기증권저축 금액과 ‘원금 손실’이라는 붉은 글씨가 선명했다.
오후 1시쯤 객장에 온 50대 주부는 “오후장에 반등해 600선이 회복될 줄 알았는데…”라며 “자고 나면 떨어지고 자고 나면 떨어지고…”라고 독백했다.
객장 입구에는 증권사 연구원들이 제시한 ‘금주의 추천종목’이 걸려 있었다. 국민은행 SKT 휴맥스…. 이들 종목은 이날 각각 5.47%, 5.13%, 4.17% 폭락했다.
증권사가 제공하는 전광판 뉴스에는 ‘고가주는 큰 폭 하락, 저가주는 선전’이라는 내용이 나오고 케이블TV에서는 분석이 계속 됐다.
자영업을 한다는 김태주씨는 “상담사들은 일단 팔아 현금을 확보한 후 투자시기를 기다리라고 했다”며 “그러나 짧은 기간 손해액이 커 차마 팔 수 없다”고 말했다.
오후 2시가 넘어 오후장 반등의 희망은 사라졌다. 하락폭이 30포인트 이상으로 커지자 그나마 몇명 없던 객장이 더욱 썰렁해졌다.
몇 시간째 주문을 망설이던 고객은 “설마 500대까지 무너지기야 하겠느냐”며 “좀 더 떨어지면 매수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고객은 “650선에서 저가 매수에 나섰다가 낭패를 당해 이제 더 투자할 돈도 없다”고 했다.
결국 종합주가지수는 35.90포인트 빠진 584.04로 마감했고 객장은 썰렁했다.
이은우기자 lib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