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한국기업 왜 경영혁신 실패하나

  • 입력 2002년 5월 21일 17시 52분


한국의 외환위기 직후 국내 대기업을 인수한 외국계 기계회사의 재무담당 부사장은 회사 임직원들과 면담을 하면서 두 번 놀랐다.

“경영기법이 후진적일 것으로 생각했던 한국기업이 프로세스 매니지먼트나 전사적자원관리(ERP) 등 첨단 경영혁신 프로그램을 이미 도입해서 놀랐다. 또 수백억원씩을 투자한 프로그램들이 모두 별다른 성과도 없이 흐지부지됐다는 것을 알고 더 놀랐다.”

▼‘유행하는 옷처럼…’ 병폐▼

한국기업들은 벤치마킹 붐이 일던 80년대 말부터 선진국 기업이 시행 중인 각종 경영혁신 프로그램을 앞다투어 도입해왔다. 전사적품질관리(TQM), ERP, 고객관계관리(CRM), 6시그마, 프로세스매니지먼트, 신인사제도, 활동기준원가회계(ABC), 지식경영 등.

그러나 이런 노력이 성공을 거둔 기업은 LG전자 삼성전자 대웅제약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왜 한국기업의 경영혁신은 용두사미(龍頭蛇尾)에 그친 것일까.

▽경영혁신은 패션이 아니다〓한국과학기술원(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김영걸 교수는 “회사의 역량이나 사정, 산업별 특성 등을 감안해서 혁신 프로그램을 도입해야 하는데 국내 기업은 경영혁신을 유행하는 옷을 사 입는 것처럼 생각한다”며 “특히 오너가 한마디하면 전 계열사가 일사불란하게 따라가는 ‘재벌기업’에서 이런 병폐가 심하다”고 지적했다.

계열사마다 사정이 다른 데 한국의 주요 그룹은 모든 계열사가 똑같은 경영혁신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일이 흔하다. 정보화 마인드가 전혀 없거나 무자료 거래가 많은 회사에 ERP를 도입하고 매출이 떨어지고 있는데 불량률을 줄이는 6시그마를 도입하는 등 해당 기업의 사정과 맞지 않는 프로그램 도입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조직내 저항극복도 과제▼

▽최고경영자(CEO)가 성패를 좌우한다〓경영혁신이 성공하려면 성공에 대한 전 임직원의 확신, 변화에 대한 저항극복, 전 직원의 참여가 선결조건. 이 모든 작업은 결국 CEO가 주도해야 하지만 적잖은 한국의 경영자들은 혁신작업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한계를 보이고 있다.

LG경제연구원 정일재 박사는 “LG그룹에 6시그마 선풍을 몰고 온 LG전자 디지털어플라이언스의 김쌍수 사장, 국민은행의 김정태 행장, 볼보건설기계코리아의 에릭 닐슨 사장은 모두 실무 직원들까지 끊임없이 접촉하면서 ‘경영혁신의 전도사’역할을 한 CEO”라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기업의 경영자들이 혁신팀을 구성해놓고도 경영혁신이 실패할 경우 내부에서의 권위 손상이나 비판을 두려워해 자신은 혁신팀에서 빠져버린다는 것.

스웨덴 볼보사가 삼성중공업 기계사업부문을 인수한 볼보건설기계코리아의 석위수 공장장은 “과거 삼성 계열사 시절 도입한 경영기법들이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CEO들이 현장에 밀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볼보의 경우 CEO가 끊임없이 현장에 내려와 경영혁신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혁신을 이행하지 못했을 경우 엄하게 책임을 추궁하는 등 변화를 주도했다”고 밝혔다.

조직 내 저항을 극복하는데도 CEO의 역할이 크다.

한국 기업 중 경영혁신에 가장 적극적이라는 평을 듣는 삼성은 90년대 중반부터 ERP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러나 각 계열사들이 ‘한국적 관행’을 내세우며 이 시스템을 변형시키면서 상당기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이건희 회장이 직접 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원칙대로 진행하라”고 지시한 뒤 삼성의 전 계열사에 ERP시스템이 정착됐다.

제임스 루니 딜로이트컨설팅 코리아 부회장은 “일부 CEO들은 컨설팅 회사가 경영혁신을 대신 해줄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며 “CEO 자신이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하지 않는 한 조직원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변화시키기는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기업 경영혁신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인
 성공기업의 특성실패기업의 특성
혁신프로그램 도입문제의 정확한 진단과 회사 사정에 맞는 혁신 프로그램 도입다른 회사가 도입한 프로그램을 검토없이 도입
위기감변화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며 조직에 위기감 불어넣기왜 경영혁신이 필요한지 직원들에게 설명도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
최고경영자경영혁신 성공에 대한 확신과 열정적 참여혁신과정에 스스로 참여하지 않고 성과만 재촉
조직 내 저항합리적인 지적은 수용하지만 과거 관행만 고집할 경우 제재저항을 효과적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과거로 회귀
커뮤니케이션상하 구분없이 끊임없이 경영혁신에 대해 토론혁신에 관심있는 직원끼리만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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