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1년 3월 25일 18시 59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현대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영결식이 거행된 25일 삼성의 한 임원은 경쟁그룹 창업자의 마지막 길을 애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청운동 자택에는 삼성 LG SK 한진 롯데 효성 등 한국 경제를 대표하는 주요 그룹 총수들이 잇달아 찾아 지도자를 잃은 현대 경영진을 위로했다. 정중한 애도와 감사의 답례가 오가면서 재계는 자연스럽게 화합했다.
97년말 외환위기 이후 재계 분위기는 빅딜(대규모 사업교환) 과정의 앙금으로 서먹해졌고 대우의 몰락과 현대의 침체, 삼성의 독주가 겹치면서 상대방에 등을 돌리는 관계로 치달았다. 그러나 창업 1세대의 상징인 왕회장 의 타계는 총수들이 경쟁과 공존의 소중함을 새삼 확인케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평이다.
▽따뜻한 조문 = 삼성 이건희 회장이 23일 빈소를 방문하고 나오자 기자들이 현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고 물었다. 이회장은 좋은 경쟁상대 라고 답했고 주변에서 이 말을 들은 현대맨들은 흐뭇해했다.
상주인 현대기아차 정몽구 회장은 현관까지 배웅하면서 조만간 한번 찾아뵙겠다 고 인사했다.
재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정리하는 의미가 강한 탓인지 고인을 향한 추모의 염(念)은 각별했다. 충남 성환에서 버섯 연구에 심취중인 LG 구자경 명예회장은 애도의 뜻이 절절히 담긴 추모사를 동아일보에 기고한 데 이어 청운동 빈소를 찾아 좀더 사셨어야 했는데… 라며 10년 선배의 별세를 애도했다. 고인의 생전에 전경련운영 방식을 놓고 크게 마찰을 빚기도 했던 한진 조중훈 회장은 거동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빈소를 방문해 고인과 화해 했고 SK 손길승회장과 최태원회장도 그룹 경영진과 함께 조문했다.
현대측은 87년 고 이병철 회장의 장례를 치른 경험이 있는 삼성측에 장례절차 등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사업의 협력으로 확산 = 재계의 화합 분위기는 경쟁사 물건은 가급적 쓰지 않는다 는 통념을 깨고 이미 사업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삼성이 현대자동차의 에쿠우스를 사장단 업무용 차량으로 구입키로 하자 현대차는 삼성카드를 법인카드로 쓰기로 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상대방이 만드는 제품 가운데 품질이 뛰어난 가스오븐레인지와 캠코더를 4월부터 각각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공급받는다.
이같은 협력은 막강한 자본력과 선진 경영기법으로 무장한 외국기업의 국내 진출이 부쩍 활발해지는 것에 대비한 자구책의 성격이 강하다. 전경련 관계자는 라이벌이 있어야 함께 발전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만으로도 큰 성과 라며 삼성 현대 LG SK가 선의의 경쟁과 협력을 병행할 때 우리 경제의 장래도 밝아진다 고 말했다.
<박원재 김동원기자>parkw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