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치 않은 환율]동남아 통화불안에 국내政爭이 부채질

  • 입력 2000년 11월 21일 18시 52분


21일 오전 10시 C은행 외환딜링룸. 원유 수입대금을 결제하기 위해 달러화를 사달라는 정유사들의 주문이 빗발쳤다.

“얼마에 살 수 있나요?” “1165원쯤이면 될 겁니다.”

그러나 순식간에 환율은 1172원으로 올랐다. 딜러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오전 11시경 A은행. 외환당국이 환율급등 대책회의를 한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딜러들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달러를 팔아치웠다.

1130원대에서 잠잠하던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환율이 숨가쁜 폭등세를 보이며 변동성도 커졌다. 재정경제부 한국은행 등 외환당국이 “달러화 수급에는 별 문제가 없다”며 불안심리를 달래고 있지만 일선 창구에서는 정반대로 “심상치 않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급등 원인〓국회파행으로 공적자금 투입 지연이 불가피해지는 등 구조조정의 불확실성이 커진 데서 원인을 찾는 전문가들이 많다. 연말에 원유수입 결제시기가 집중돼있는 정유사들의 달러 수요도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씨티은행 오석태 부장은 “수출 증가세와 외국자본 유입이 둔화되는 시점에 구조조정 지연에 대한 실망감이 겹쳤다”고 분석했다. 한마디로 한국경제가 좋을 게 없는데 원화가 강세를 보일 이유가 없다는 것.

대외적으로는 대만 등 동남아 통화불안이 계기가 됐다. 대만당국은 최근 20억∼30억달러의 보유외환을 시장에 쏟아부었지만 환율 급등을 잡지 못했다. 외국인들은 우리나라도 대만처럼 반도체 및 정보통신 비중이 높은 ‘유사국’으로 보고 있다. 일본 엔화 역시 모리 요시로 총리 불신임파동 등 정국불안으로 달러당 110엔 정도로 약해졌다.

직접적으로는 역외선물환(NDF) 시장에서 달러화 투기성 매수가 늘어나면서 원화선물 환율이 1160원대로 급등한 것이 서울 외환시장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97년 외환위기 직전에도 NDF가 원화선물을 매각, 환율 급등을 촉발했다.

▽어떤 영향을 미칠까〓중장기적으로는 국내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을 높여 수출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지만 단기적으로는 수입물가 상승을 불러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은행은 모든 외국통화에 대해 원화환율이 10% 오를 경우 소비자물가는 1.7∼1.9%, 생산자물가는 2.6∼3.7% 상승압력을 받는다는 자료를 내놓았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환율이 급격하게 오를 경우 올들어 10조9188억원어치의 주식을 순매수한 외국인들이 투자자금을 빼내 한국을 떠날 가능성. 달러당 평균 1120원에 주식을 샀는데 증시침체로 재미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환율이 폭등, 환차손 위험까지 생겨 이중고를 겪고 있어 대규모 자본유출 위험이 생겼다는 것.

자금시장 역시 단기적으로는 물가 오름세심리에 따른 금리상승 유발효과, 중장기적으로는 수출증가로 인한 기업 자금난 해소로 금리를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환율상승 계속될까〓전망이 크게 엇갈린다. 한국금융연구원 박해식(朴海植)박사는 “구조조정이 잘된다면 국내경기는 완만한 상승세를 계속할 것”이라며 “이 경우 환율은 연말 1100원대 초반, 내년에는 1080원 안팎에서 오르내릴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ABN암로 정인우 지배인은 “환율이 다소 하락할 때마다 정유사들의 달러화 ‘사자’주문이 들어와 환율이 좀처럼 내려갈 것 같지는 않다”며 연말에도 1150원 아래로는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외환은행 이정태(李正泰)딜러도 “환율은 연말 1170원대, 내년에는 1200원 안팎에서 등락을 거듭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경준기자>news91@donga.com

▼NDF시장?▼

우리나라 밖에서 형성된 원화 선물시장. 95년쯤 싱가포르와 홍콩의 외환딜러들에 의해 형성돼 지금은 런던 뉴욕 등지에서도 원화선물이 거래된다. 주식시장에서의 ‘종목’처럼 원화가 거래되지만 결제는 매도 매수액의 차액에 대해 달러화로 결제한다. 예컨대 A은행이 석달 뒤 달러당 1200원에 B은행으로부터 100만달러를 사들이기로 계약했다고 하자. 3개월 후 현물시장 환율이 1300원이 된다면 A은행은 달러당 100원씩 총 1억원의 이득을 보게 되고 B은행은 이 돈을 달러로 지급한다.

적극적으로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적 거래가 대부분. 그러나 환율변동 위험을 피하기 위한 헤지거래도 꽤 있다.

‘99년 4월 1차 외환자유화 이후 원화거래는 국내 외환시장에 흡수돼 비중이 줄었지만 아직까지 원화 환율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최근에는 서울외환시장 시가(始價)가 뉴욕 NDF시장 종가와 비슷해지는 모습이다.

<정경준기자>news91@donga.com

▼외환딜러의 현장진단▼

21일 외환은행 외환딜링룸. 지난주까지만 해도 수개월 동안 지속된 원―달러환율의 횡보로 거의 일손을 놓고 있었던 딜링룸이 원달러 환율의 급등으로 모처럼 만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이곳의 외환딜러인 이정태(李正泰·사진)씨는 “환율이 이렇게 오르리라고는 지난주까지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딜러들도 다소 당황하고 있다”며 분위기를 전했다.

이씨는 “일반적인 환율 상승에 대한 우려와는 달리 딜러들은 최근의 원―달러환율 상승(원화가치 하락)을 ‘환율 제자리찾기’로 보고 있다”며 “97년 말과 같은 환율 급등은 없을 것으로 생각되며 국제통화기금(IMF) 직전 상황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잘라 말했다.

즉 경기둔화 우려와 유가상승 및 반도체가격 하락 등으로 환율상승요인이 많았으나 그동안 외국 주식투자자들이 꾸준히 달러를 갖고 들어오면서 환율상승을 눌러왔다는 것. 그러나 최근 외국인 자금 유입이 둔화돼 환율 상승을 억제해왔던 요인이 제거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씨는 “원―달러환율이 큰 변동이 없자 환위험에 특별히 대비해오지 않았던 기업들이 달러 사들이기에 나서면서 환율 상승에 불을 지피고 있다”며 “주로 헤지(위험 회피) 목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며 아직까지 사재기 수준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환율상승은 오른다는 그 자체보다 상승폭이 크다는 점이 다소 우려되는 대목이지만 정부개입 등이 적절히 이뤄지면 급등세가 지속될 것 같지는 않다”며 “연말에는 원―달러환율이 1170∼1180원 선에서 움직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박현진기자>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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