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퇴출]"오만한 황제-2세경영 부실 낳았다"

  • 입력 2000년 11월 5일 18시 29분


새 정부 들어 두번째로 단행된 부실기업 퇴출에서 29개 기업이 한꺼번에 간판을 내리게 됐다. 특히 재계서열 10위권을 다투던 동아건설이 끝내 법정관리에 들어간데다 현대건설마저 운명이 불투명하다. 40년 재계사에 또 한 차례 큰 획이 그어지고 있는 것이다.

재계는 기업의 부침과 관련, △황제 경영 △2세 경영인의 과욕 △재벌과 정치 등을 염두에 두고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황제경영, 더 이상 안통해〓현대건설이 끝내 채권단으로부터 냉대를 받고 있는 것은 현대의 독단적인 경영체제, 즉 ‘황제경영’에 대한 불신이다. 따라서 총수와 ‘오너 패밀리’의 독단경영이 더 이상 ‘시장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한진그룹이 수시로 어려움을 겪는 것도 독단경영 때문이며 거평이나 대농 진도 등도 변화무쌍한 흐름을 읽지 못해 간판을 내린 상태다.

A그룹의 고위 임원은 “시장은 디지털시대에 접어들었는데도 오너만큼은 60, 70년대 아날로그식 사고로 고집을 부리다가는 시장,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당한다”며 “앞으로 시장을 우선하는 재계의 판도 변화는 더욱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전망했다.

▽수성(守成), 창업보다 어려워〓최근 기업의 급격한 몰락과정에서 나타난 또 하나의 큰 특징은 2세 경영인의 과욕(방만 경영)이다. 동아건설 삼미 한라 한일합섬 등이 대표적이다. 일부 2세 경영인들이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등 다각적인 변신을 모색하고 있으나 성공여부는 미지수다. 2세 경영인들이 방만 경영에서 발을 빼지 않는 한 몰락의 진원지라는 불명예를 피할 수 없는 실정이다.

창업주들은 치열한 정글 속에서 기업을 일구었다. 반면 2, 3세들은 온실 속에서 자랐다. 그들은 험난한 ‘정글의 법칙’을 모른 채 사업을 확장했다. 창업주가 호랑이라면 2, 3세는 ‘무늬만 호랑이’인 셈이다. 투철한 기업가정신이 모자라고 밑바닥 사정도 잘 모르니 사상누각을 세울 가능성이 크다. 2, 3세 오너들은 전문경영인들의 전문성을 무시하고 ‘측근’들의 달콤한 말에만 현혹되다가 판단력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

▽재벌과 정치, 가까우면 곤란하다〓이번 정권 출범과 함께 소위 ‘잘 나가던’ 대우와 현대가 잇달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우 김우중 회장은 한때 주기적으로 김대중 대통령과 독대하며 새 정부의 재계 쪽 개혁을 주도했고 현대(정주영 전 명예회장) 역시 남북경협을 강력하게 밀어붙여 정부의 대북사업, 궁극적으로는 남북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반면 정권초기 핵심사업을 도려내는 아픔을 경험했던 삼성과 LG는 그 반대의 경우다. 새 정부 출범 직후 삼성(이건희 회장)은 그토록 열성을 바쳤던 자동차 사업의 꿈을 접어야 했다. 대표적인 개혁대상으로 찍힌 삼성은 고위인사의 표현대로 정권초기 ‘숨을 죽이고’ 지냈으나 올해엔 8조원의 순익이 예상될 정도로 호황을 맞고 있다. LG 역시 재벌개혁의 한 축이던 빅딜(대규모 사업교환)과정에서 반도체사업을 현대에 넘기고 눈물을 흘렸으나 현재 정보통신과 에너지, 전자를 축으로 새로운 도약의지를 다지고 있다.

기업이 정치에 너무 가까이 하면 자생력을 잃게 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재벌, 더 이상 불패신화는 없다〓정부의 보호 아래 금융을 독점하고 독과점적으로 판매해온 재벌이라 하더라도 변화의 대세를 거스르면 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남덕우(南悳祐)전 총리는 “경영능력의 처음과 끝은 변화에 신속히 적응하는 것”이라고 전제, “요즘처럼 변화가 빠른 상황에서는 변화를 예측하고 적응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지 못하는 경영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산업개발연구원 백영훈(白永勳)원장은 “요즘 신생 기업인들에게서는 청교도적인 기업가정신을 찾을 수 없고 재벌들에게서는 철학의 빈곤을 느낀다”며 “사회적 변화가 급박할수록 상대적 빈곤을 배려하고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는 경영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종재기자>j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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