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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0월 19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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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은 19일 이사회를 열고 현대건설이 보유한 중공업주식(6.93%) 1050억원어치와 비상장회사인 현대정유주식(4.58%) 560억원어치를 매입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현대건설이 발행할 전환사채(CB)와 현대건설이 보유한 아산재단주식 매입건은 이사회에 상정되지 않았다.
현대자동차 정몽구(鄭夢九)회장은 이날 간부회의에서 “다임러크라이슬러 등 대주주와 소액주주의 권익을 보호해야 하고 시장원리를 충실히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현대건설의 전환사채를 인수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결국 현대건설이 약속한 5810억원의 추가 자구계획안 중 일부분(1250억원)이 지켜지기 어려운 상태다.
▽시장의 힘이 혈육(血肉)의 정을 눌렀다〓현대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현대자동차와 중공업은 현대건설이 발행할 전환사채(CB)와 아산재단주식을 매입해주기로 최고위층간에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측은 “구체적으로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현대 관계사나 계열사에서 전환사채나 아산재단주식을 사주기로 논의가 진행중이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현대 관계사를 현대자동차소그룹, 현대중공업으로 추정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세 형제가 모처럼 화해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긍정적인 반응과 “지극히 한국적인 해법”이라는 반응이 엇갈렸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달랐다. 19일 오전 현대차와 현대중공업의 주가가 일제히 떨어진 것. 유동성위기에 몰린 회사의 주식(현대건설)이나 대북사업을 하면서 적자를 면치 못하는 기업(현대아산)의 주식을 매입하는 것은 주주이익에 반한다고 본 것. 시장논리에 ‘모기업’이니 ‘형제간’이니 하는 정서적인 단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결국 현대자동차는 아예 발을 뒤로 뺐다. 현대중공업은 회사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중공업주식과 정유주식만을 매입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다급해진 현대건설〓“일이 꼬이고 있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 CB와 아산주식을 매입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현대건설이 다급해졌다.사실 현대건설로서는 CB 발행이나 아산주식 매각이 어려워져 1250억원을 마련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자구계획이 조금이라도 틀어질 경우 외환은행 외에 다른 은행들이 현대건설의 회사채 차환발행(롤 오버)을 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다른 은행들이 회사채의 만기를 연장해주지 않을 경우 현대건설은 언제 유동성위기에 몰릴지 모르는 상황이다.외환은행 이연수 부행장은 이날 오후 “CB 발행이나 아산주식 매각이 여의치 않으면 다른 자구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건설은 또 팔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 찾기 위해 텅 빈 곳간을 다시 뒤져야 할 형편이다.
<이병기·이나연기자>ey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