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태의 실리콘밸리 리포트] 거대한 '생태계'

  • 입력 2000년 4월 9일 20시 21분


수많은 벤처기업이 명멸을 거듭하며 정보기술(IT)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진원지, 실리콘밸리. 미국 경제가 ‘신경제’라는 용어까지 만들어내며 장기 호황을 누리는 원동력으로까지 꼽힌다. 동아일보는 작년 8월부터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로 미국에 체류중인 ‘벤처기업 전문교수’ 배종태(裵鍾太)한국과학기술원(KAIST)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의 ‘실리콘밸리 리포트’를 매주 월요일자에 연재한다. 배교수는 ‘벤처의 메카’에서 보고 느낀 경험담과 국내 벤처기업가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생생하게 전달할 예정이다.

배교수는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나와 KAIST에서 경영과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후 96년부터 테크노경영대학원에서 벤처 경영에 대해 강의해 왔다.

<1> 거대한 ‘생태계’

실리콘밸리 지역은 나지막한 건물들 사이로 나무가 많은 전형적인 미국 전원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만들고 이끌어 나가는 실리콘밸리의 비밀은 스쳐 지나가는 방문객의 눈에는 여간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제조업 중심의 공업단지를 바라보는 물리적인 ‘눈’으로는 실리콘밸리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실리콘밸리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우수한 전문 인력과 새로운 사업 기회, 탁월한 인프라가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habitat)’이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생태계의 가장 큰 특징은 우수한 인력과 기술이 많이 모여 있고 또 계속 창출된다는 점이다. 유능한 벤처캐피털리스트(VC)들과 시장은 옥석(玉石)을 가려내는 ‘필터’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이 필터를 통과한 소수의 벤처기업은 인수합병(M&A)이나 상장(IPO)을 통해 엄청난 보상을 받게 되는 투자회수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전문성과 정직성을 갖춘 VC들, 대학교수와 변호사, 시장조사 및 마케팅 전문가, 컨설턴트, 새로운 형태의 창업보육센터 운영자 등이 남이 못 본 사업기회를 먼저 발견한 창업팀과 거대한 인적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이 네트워크를 이루는 양대 축은 바로 스탠퍼드대와 VC들.

“스탠퍼드대가 없었다면 실리콘밸리가 만들어질 수 없었고 실리콘밸리 덕분에 스탠퍼드대는 세계적 대학이 됐다”는 이 대학 빌 밀러 교수의 지적처럼 스탠퍼드대는 실리콘밸리의 모태다. 스탠퍼드대에선 매일같이 벤처기업가와 VC들을 초청한 세미나와 강의가 여기저기서 개최된다. 어떤 형태로든 스탠퍼드대와 네트워크를 가지는 것이 실리콘밸리에서 성공적으로 사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벤처기업의 과반수는 이 대학 출신의 CEO나 이사진을 갖고 있다.

스탠퍼드대는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고 고급인력을 양성하는 원천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실리콘밸리의 여러 주체들이 상호 연계하는 네트워크 축으로서의 역할도 성공적으로 해온 것이다.

실리콘밸리 네트워크를 이루는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은 VC들. 지난해 4·4분기(10∼12월) 실리콘밸리에 투자된 벤처캐피털의 규모는 총 57억달러. 같은 기간 미국 전체 벤처캐피털 투자 147억달러의 약 39%에 이른다. 캘리포니아 지역 전체의 벤처캐피털 투자는 미국 전체의 49%. 지역별 순위로 2위인 보스턴 중심의 뉴잉글랜드 지방의 투자액이 16억달러로 전체의 11%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실리콘밸리의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의 VC들은 앉아서 투자한 돈이 회수될 때만 기다리지 않는다. 필요하면 경영진도 새로 스카우트하고 투자 기업을 서로 연결해 새로운 기회를 엮어준다. 반면 1라운드에 투자한 기업의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되면 후속 라운드의 추가 투자는 과감히 중단한다.

벤처기업가들도 단순히 자금줄 역할만 하는 VC는 꺼린다. 기업가치 평가나 지분 결정에서 다소 불리해도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VC를 원한다. 반면에 엔젤이나 VC로부터 투자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한 기업가는 헛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않고 초기에 꿈을 접는다.

실리콘밸리에서는 한 기업이 상장하거나 인수합병될 때 몇 명에서 많으면 수십명의 백만장자가 생겨난다. 매일 평균 64명의 백만장자가 태어나 현재 25만명을 넘었다는 통계도 있다. 하지만 이런 성공 뒤에는 비전을 가진 벤처기업 창업팀의 피땀어린 노력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우리나라처럼 수십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고 해서 이미 성공한 것처럼 착각하는 벤처기업가는 없다. 투자 유치는 이들에겐 단지 시작일 뿐이다.

중장기적으로 어느 나라나 VC와 시장이 필터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벤처산업 전체의 미래는 위태롭게 된다. 생태계가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각 개체의 경쟁이나 노력과 함께 ‘적자생존’이라는 대원칙이 유지돼야 하기 때문이다.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현 스탠퍼드대 객원교수)

ztbae@gsb.stanfo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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