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0년 3월 7일 20시 06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낡은 아파트를 재건축하자는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공정하게 사업을 추진했지만 시공사의 로비를 거부하다가 조합장 자리를 빼앗겼기 때문. 시공사측이 제의한 술자리를 몇 차례 거부하면서 시공사의 요구에 까다롭게 대응하자 조합 내부에 갑자기 집행부 반대세력이 생겨났다. 이들은 “조합장이 조합원에게 불리하게 조합을 운영하고 있으며 전과도 있다”는 식으로 H씨를 음해해 결국 조합장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조합장이 바뀌자마자 시공사는 추가정산금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조합비리와 관련된 각종 의혹까지 터져나와 지금은 사업 자체가 좌초될 위기에 놓여 있다.
이같은 조합 내부의 비리가 재건축 현장에 만연하고 있다. 조합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시공사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조합도 있지만 비리와 관련된 잡음이 끊이지 않는 조합이 적지 않다.
조합비리에 연루돼 처벌받은 조합 관계자가 줄잡아 수백명에 달하지만 끊임없이 매수를 시도하는 시공사와 거액을 챙기려는 일부 집행부와의 검은 고리는 단절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시공사는 사업규모에 따라 10억∼30억원 가량을 조합에 대한 로비 비용으로 쓰고 있다. 여기에 기생해 조합장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까지 생겨났을 정도. ‘한번 쇠고랑 차고 평생 쓸 돈을 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돈다.
▼ 시공사서 조합장 매수 ▼
▽조합비리 이렇게 생긴다〓시공사는 우선 사업예정지를 돌며 조합장 후보를 발굴한다. ‘끼’있는 주민이 업체를 찾아가 ‘제휴’를 청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조합이 결성되기 전인 추진위원회 단계에서부터 특정 업체가 시공사로 선정되도록 분위기를 잡는 역할을 한다. 주민들은 이들의 말에 귀가 솔깃해 조합설립에 동의하게 된다.
시공사의 제의를 거절하는 인물이 조합장이 되면 시공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대세력을 키워 새로운 ‘꼭두각시’ 조합장을 만들어낸다. 이 때 즐겨 사용하는 방법은 흑색선전. 조합장의 전과, 여자관계 등 약점을 새로운 ‘후보자’에게 알려 비방을 하게 만들거나 심지어는 시공사와의 유착 의혹을 퍼뜨리기도 한다.
A건설업체 관계자는 “사업초기 단계에서는 시공사가 마음만 먹으면 조합장을 원하는 인물로 바꿀 수 있다”면서 “소문이 안 나도록 새 조합장 후보와의 접촉은 최대한 줄이며 로비자금도 사업승인이 난 뒤에 주는 경우가 많다”고 털어놨다.
▼ 부대공사 발주권 넘겨줘 ▼
▽비리 조합장 얼마나 챙기나〓사업규모에 따라 10억∼20억원이 보통이다. 대규모 사업일 때는 30억원을 챙기는 경우도 있다. 로비자금은 보통 비용 검증이 힘든 토목공사를 통해 조성돼 조합장을 비롯한 집행부에 건네진다.
이들이 시공사로부터 받는 현금은 총액의 절반 가량. 나머지는 철거용역 새시 부엌가구 등 각종 부대공사 발주권을 넘겨받아 챙긴다. B건설업체 관계자는 “사업초기부터 입주 때까지 조합집행부에 드는 비용은 5000평 기준으로 10억∼15억원 가량”이라며 “부대공사 발주권은 집행부쪽에서 요구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전했다.
▼ 조합원만 손실 떠안아 ▼
▽조합비리 왜 생기나〓사업운영권을 통해 거액을 챙기려는 일부 집행부와 추가정산금을 많이 받아내려는 시공사의 이해가 맞아떨어지기 때문. 피해는 고스란히 조합원들의 몫이다.
B건설 관계자는 “까다로운 집행부가 버티고 있을 경우 사업진행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공사기간 중 추가정산금을 받아내기도 어렵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업초기에 조합집행부를 시공사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무리한 욕심을 내는 일반 조합원에게도 책임은 있다. 돈을 안들이고 새집을 얻으려는 욕심이 조합비리를 부추긴다는 것.
대한주택공사 박신영연구원은 “재건축으로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허황된 생각 때문에 해결사를 자임하는 조합집행부에 속아넘어가는 것”이라며 “조합원 스스로 다른 사업지의 사례 등을 꼼꼼히 분석한 뒤 사업을 진행해야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정훈기자> sunshad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