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재경장관 폭탄발언 재계 '술렁'…공식반응 자제

  • 입력 2000년 1월 14일 18시 50분


“대기업 오너들도 달라진 패러다임에 순응해야 한다. 그들의 기득권 보호장치인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없어져야 할 조직이다.”

“회장단 면면을 봐라. 대부분 채권단의 의지에 얹혀 있는 사람들이다. 변화를 무시하고 기득권 지키려다간 망하기 십상이다.”

이헌재 신임 재정경제부장관의 13일 발언이 재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개인소신을 비공식적으로 밝힌 것이긴 하지만 재벌기업 지배집단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가감없이 노출시켰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지난해 전윤철 공정거래위원장이 전경련의 개혁 필요성을 제기하긴 했지만 이장관은 직설적으로 ‘가장 아픈 곳’을 건드렸기 때문.

이장관의 ‘전경련 해체’ 발언은 사회 각 계층에 포진한 수구세력들의 조직적 반발을 질타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금감위는 “대우 김우중회장처럼 일부 오너들의 잘못된 상황인식과 처방을 문제삼은 원론적인 발언”이라고 해석하면서 발언파장이 수그러지기를 기대하는 눈치다. 재경부는 아예 “이장관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고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이장관은 사석에서 여러차례 비슷한 대기업 오너관을 밝힌 바 있어 DJ정권 중기 내각의 대대적인 재벌개혁 강공을 예고한 대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장관은 최근 전경련이 내놓은 ‘코스닥시장 급성장의 허와 실’이란 보고서를 재벌 기득권방어의 대표적 사례로 지목했다. 그의 보고서 평가가 합리적인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향후 우리경제의 미래를 대그룹보다 벤처에서 찾으려는 벤처지향적 정책관이 엿보인다.

이장관은 지난해 5대 재벌 빅딜 등 재벌개혁을 유도하면서도 오히려 재계의 상당한 신망을 얻었다. 개혁의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불편부당하고 재계의 현실적 어려움을 잘 헤아릴 줄 아는 장관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전경련 관계자는 14일 “이장관이 갑작스럽게 무엇에 홀린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손병두전경련부회장은 “개인적 발언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겠다”며 “전경련의 변화를 바라는 충고로 생각하며 전경련은 이미 변화하고 있다”고 되받았다. 최근 ‘정부와의 갈등’을 우려해온 전경련은 아예 ‘무대응이 상책’이라며 입에 자물쇠를 채웠다. 15일엔 그동안 정부관료들을 ‘사이비 시장경제주의자들’이라고 공세를 펴온 자유기업센터도 공식 분리한다.

그렇다고 재계의 속마음이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익명을 요구한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공인으로서 할 얘기와 해선 안될 얘기가 있다”면서 “전경련 운영에 돈 한푼 안내는 사람이 임의단체의 해체를 운운할 수 있느냐”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5대 그룹의 한 임원은 “장관의 한마디는 실시간으로 전세계에 타전된다”며 “누가 우리나라를 시장경제체제라고 하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관치시대에 관료생활을 했던 이장관이 또다시 ‘신관치시대의 서막을 열고 있다’는 비아냥도 터져나왔다.

재계는 이미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재벌때리기’를 우려해 정부와의 화해무드 조성에 진력해왔다. 이번 이장관의 강성발언 파장으로 다음달 전경련회장 인선부터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