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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9년 6월 25일 23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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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미(閔泳美)씨를 ‘귀순공작원’ ‘대북전문모략꾼’이라고까지 비난하면서 억류명분을 찾았던 북한이 25일 ‘남측 사과’라는 요구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씨를 풀어준 것은 명분에 집착하는 북한으로서는 다소 의외의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정부는 이같은 북한의 선택을 예견했었다. 황원탁(黃源卓)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 등 정부 당국자들은 24일부터 ‘민씨 주말 석방’ 전망을 흘렸다. 북한이 명분을 붙들고 있을 만큼 여유가 없다는 점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우선 30일은 현대가 북측에 매달 보내는 금강산 관광사업 관련 비용 800만달러의 송금 마감 시한. 당장 현금이 아쉬운 북한이 민씨 한 사람 때문에 거액을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정부가 민씨 문제를 금강산 관광사업 전반과 연계한 것도 주효했다. 북한이 수십억달러 규모의 금강산 관광사업 중단을 감수하면서까지 민씨 문제에 매달리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분석된다.
25일 아태평화위 대변인이 발표한 담화 중 ‘금강산에 빨리 와보고 싶어하는 남조선 동포들의 심정과 현대그룹과의 관계를 고려…’ 운운한 대목은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한 북한측의 속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 민간인 억류가 길어지면 국제사회가 인권 차원에서 관심을 갖게 된다. 따라서 북한이 민씨를 송환키로 한 데는 인권문제에 관한 한 국제사회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인질 억류극’의 오명까지 뒤집어쓸 수는 없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남한 내 여론으로 볼 때 민씨 문제가 자칫 대북 추가비료지원 중단으로까지 연결될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작용한 듯 하다.
지극히 ‘상식적인’ 북한의 석방결정이 이례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그동안 북한이 이른바 ‘벼랑끝 협상’이라는 ‘비상식적인’ 협상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들어 이같은 북한 태도에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금창리 지하핵의혹시설 방문조사 협상만 해도 미국 의회가 시한으로 정한 5월말이 아니라 3월에 타결됐다. 북한이 사찰 보상금으로 요구했던 3억달러도 경수로 협상 때와 다른 ‘소액’이었다.
북한의 태도 변화는 그만큼 북한 사정이 절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향후 남북관계 개선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 당국자들이 중국 베이징(北京) 남북 차관급회담에서의 이산가족문제 해결까지도 점치는 이유 또한 북한의 ‘실리주의 선회’를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 또한 이번 사건을 계기로 햇볕정책의 부분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특히 북한이 이번에 ‘꼬리’를 내린 것은 금강산 관광 중단 등의 가능성을 언명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회의 결정이 주요인이었다는 게 대북관련 당국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결국 정부는 앞으로 포용정책의 ‘총론’은 유지하되 개별 대북협상 등 ‘각론’에서는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박제균기자〉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