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가 남긴것 ⑭]「경제 표류」 산업정책 있나 없나

  • 입력 1997년 5월 15일 20시 02분


『鄭泰守(정태수)총회장이 쇳가루를 만지면 돈번다는 점쟁이 말만 믿고 제철사업에 뛰어든 건 아닙니다. 산업정책의 든든한 배경이 배짱을 키웠다고 봐야죠』(한보철강 전임원 K씨) 한보가 제철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94년 통상산업부는 장기적으로 철강 공급이 부족할 것이라는 수급전망 보고서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고로(高爐)방식의 일관제철소 건설을 그룹 최대의 숙원으로 삼아온 현대 등의 진입은 차단돼 있었다. 한편 통산부는 94년 8월 포항제철에 『이제는 고로방식으론 경쟁력이 없다』며 광양제철소에 코렉스공법의 설비를 하도록 적극 유도했다. 그러다 95년 5월에는 3백만t 규모의 고로 설비를 증설하라고 말을 바꾸었다. 특정 기업의 일관제철사업 진입을 막으려다 보니 상황에 따라 입장이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었다. 한보는 그 틈새를 뚫고 95년 2월 통산부가 보증한 「최첨단설비」인 코렉스방식을 덜컥 잡은 것. 그러나 정부 정책에 절묘하게 올라탔다고 기뻐했던 한보는 거꾸로 일관성없는 산업정책의 유탄에 쓰러진 꼴이 됐다. 한보는 코렉스공장에 앞서 미니밀공장을 지었으나 이마저 힘을 잃었다. 정부가 포철에도 미니밀공장을 허용한 것이 한 배경. 결국 한보는 현대그룹의 일관제철사업 진입을 막으려는 정부의 들러리를 섰다는 것이 재계 일각의 해석이다. 현정부 출범 이후 산업정책의 큰 틀은 세번이나 바뀌었다. 첫해인 93년 6월에는 업종전문화 방안이 제시됐다. 재벌그룹에 주력업종 2개씩을 선택하도록 해 주력업종에 대해서는 은행 돈을 마음대로 쓰도록 하되 다른 업종에 대해선 돈줄을 죄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94년말 삼성그룹에 자동차사업을 허용한 뒤 95년엔 「산업정책의 원칙은 효율을 높이는 것」이라는 명분 아래 원자력발전 등 3개 업종을 빼고는 원칙적으로 진입장벽을 텄다. 그리고 올해 1월 통산부는 업종전문화제도의 폐지를 공식 선언했다. 하지만 대원칙보다는 사안별 선별 지원과 제동이 우선하는 것이 산업정책의 현실적 모습이다. 작년 11월13일 朴在潤(박재윤)통산부장관은 현대의 제철사업 불허 방침을 흘렸다. 그리고는 11월15일 공업발전심의위원회를 갑자기 열었다. 회의 소집은 10일 이전에 통보돼야 한다는 공발심 규정은 무시됐다. 통산부 관리들은 들러리를 설 수 없다고 버티는 공발심 민간위원들을 회유 설득하여 어거지로 「현대의 제철사업 진출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산업정책의 표류에는 정치논리가 깊숙이 개입돼왔다. 한보가 지난해 시베리아가스전 개발사업에 참여하려 할 때 통산부는 한국가스공사 편에 서서 한보의 사업계획서를 수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보는 통산부도 모르는 사이 가스사업권 승인서를 손에 쥐었다. 통산부보다 훨씬 윗선의 「큰 사랑」이 쥐어준 선물이었다. 삼성에 대한 승용차사업 허용과 현대에 대한 제철소 불허는 산업정책의 핵심부분이 정치의 산물임을 잘 보여준다. 삼성이 승용차 사업에 진출하려 할 때 통산부는 공급과잉 우려를 들어 불허 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결국 통산부가 삼성에 졌다. 통산부 위에 청와대가 있었던 것이다. 통산부측은 현대 관계자들에게 「철강은 국가기간산업이고 자동차는 아니다」는 논리를 폈다. 매출 기준 산업규모는 자동차가 철강의 1.4배인데도 그런 구분이 유효하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희소한 자원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요인을 먼저 고려하는 시스템은 결코 생존할 수 없다. 이것은 크게는 사회주의 붕괴에서부터 작게는 우리의 산업정책에서 수없이 경험했던 사실이다』(鄭甲泳·정갑영 연세대교수) 산업정책을 대체할 방안으로 합리적 금융시스템이 거론되고 있다. 자원배분을 금융시스템에 맡기자는 얘기다. 그러나 국내 금융산업은 근본적 개편이 없는 한 자체의 생존조차 어려운 형편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LG경제연구소 金柱亨(김주형)이사는 『산업정책 기능을 금융이 담당하지 못하면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시스템이 없는 진공상태를 맞고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경제연구소 丁文建(정문건)상무는 『부도사태를 시장기능(기업과 은행)에 맡긴다고 할 때 과연 은행이 부실경영을 인수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런 가운데 현 경제팀은 『기업의 진입과 퇴출은 기업 스스로에 맡겨야 한다』고도 했다가 『자금력이 있다고 사업진출이 가능풉섟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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