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선호가 확실한 친할머니와 살았다. 아빠, 엄마는 맞벌이를 해서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할머니는 나보다 오빠를 더 챙겼다. 귀한 바나나는 오빠 입에만 있었다. 따끔하게 야단 맞는 게 무서워 몰래 밖에 나가 놀이터 구석에 숨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엄마는 시어머니와 딸이 함께 있는 시간을 줄이려고 딸을 온갖 학원으로 돌렸다. 서예, 십자수, 수영, 웅변까지 안 배운 게 없다. 잔뜩 움츠려 기를 못 펴던 딸은 유독 피아노를 치며 노래할 때 편안했다. 엄마는 그런 딸을 예술중학교로 보냈다. 선화예중 3학년 때, 딸은 자신에게 ‘노래 DNA’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시험에서 국창(國唱) 임방울 선생(1904∼1961)에 대한 주관식 문제가 나왔는데 틀렸다. 엄마는 백과사전을 들고 오라고 했다. 알고보니 명창은 엄마의 아버지, 즉 딸의 외할아버지였다. 10살 때 아버지를 여읜 엄마는 재능이 있었음에도 외할머니(한애순 광주 판소리 무형문화재 1호)의 반대로 국악을 하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남편의 힘든 삶이 자식에게 물려지지 않길 바랐다. 음악을 포기한 엄마는 딸에게 꿈을 넘겼다.
딸, 소프라노 박성희에게 노래는 운명이다. 노래는 말수 적고 수줍음 많던 그에게 숨이 되는 유일한 통로였다. “대학(이화여대 성악과)에 가서도 ‘프리마돈나’의 꿈은 없었어요. 저를 유일하게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게 노래였어요. 노래만 하면 가슴이 뚫렸어요. 그렇게 ‘지금’을 살고 싶다는 마음 뿐이었죠.”
노래를 부르면 치유가 되는 나에게만 집중했다. 거창하게 뭘 해보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졸업 직전까지는.
>> 두 번 마주한 한계 … 소리를 버리고 다시 배우다
“메조소프라노 김신자 선생님(전 이화여대 성악과 교수)과 등산을 하는데 대뜸 ‘하늘이 너에게 주신 기막힌 목소리로 인생 한 번 걸어보는 건 어때?’라고 하셨어요. 그 말이 계속 뇌리에서 맴돌았어요.”
처음으로 내 목소리를 갈고 닦아 나눠주고 싶고, 노래로 얘기하고 싶었다. 졸업 후 무작정 짐싸서 이탈리아로 날아갔다. 자신있게 이탈리아 밀라노 국립음악원 시험을 봤다. 현실은 냉정했다. 첫 해 떨어졌다.
“말과 역사가 다른 곳이잖아요. 단 번에 인정을 받겠다고 자신한 것 자체가 욕심이었죠. 그 때 알았어요. 노래도 세월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이탈리아 언어와 역사, 문화 공부를 했다. 두 번째 도전. 인터뷰에서 ‘이 나라에 정말 잘 스며들고 싶다’고 했다. 그들 정서에 관통했다. 합격이었다. 노래를 제대로 잘 할 일만 남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전국으로 성악의 대가(大家)들을 찾아다녔다. 자존심이 또 한 번 무너질 수 있었지만 버틸 각오를 했다.
“그러다 렌초 카셀라토라는 선생님을 만났어요. 그 분이 절 보더니 다짜고짜 밥을 차려주더라고요. 보통 선생님들은 칭찬을 먼저하는데 달랐어요.” 하지만 이탈리아의 유명 테너가 자기를 찾아온 낮선 동양인 여학생에게 대접한 식사의 의미는 따로 있었다. ‘너는 여기서 성공할 수 없다’는 ‘돌려까기’였다.
“이미 제 목소리가 한국적으로 굳어졌다는 거예요. 편한 발성의 출발점인 벨칸토 창법으로 바꾸기 어렵다고요. 냉정하게 한국으로 돌아가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해요. 제가 희망이 없는지 계속 물으니까…쐐기를 박더라고요.”
‘정 그렇다면 2년 동안 노래하지 말라’고 했다. 그 어렵다는 국립음악원에 들어갔는데, 이해하기 힘들었다. 받아달라고 몇 번이고 다시 렌초를 찾아갔다. “그 할아버지 선생님이 자기 친구가 하는 시골 농장에 데려갔어요. 농장서 기르는 소를 가르키더니 ‘음메’ 울음 소리부터 배워야 한다는 거예요.”
그는 노래를 멈추고 ‘소리’를 다시 배웠다. 밀라노에서 렌초 선생님이 사는 아드리아로 이사갔다. 그곳 카페 아주머니 부부가 작은 동양인 소프라노 지망생을 딸처럼 예뻐했다. 아주머니가 만들어주는 카푸치노 한 잔이 좋아 늘 출근 도장을 찍고 음악과 조금 멀어져 평범한 일상을 살았다. 그러니 굳어 있던 발성이 하나씩 허물어졌다. 렌초 선생님은 그래도 칭찬을 해주지 않고 ‘너의 꿈을 응원한다’고만 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나간 첫 콩쿠르에서 생애 첫 1등. 정통 이탈리아 발성이 스며든 그의 노래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본격적으로 그는 유럽 주요 무대에 섰다. 동양인 최초로 이탈리아 최고 음악 학위 과정인 ‘코르소 비엔니오’를 취득했다. 수많은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오페라 ‘마술피리’, ‘라보엠’, ‘리골레토’, ‘라트비아타’ 등에선 주역을 맡았다. 흘러흘러 한국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라는 수식어가 이름 앞에 붙었다.
“좌절하고 조롱 받았던 시간이 오히려 기회가 됐어요. 그 과정이 없었다면 금방 매너리즘에 빠졌을 거예요.”
>> 내 상처를 이해하니 다른 사람 결핍이 보였다
비로소 어린 시절의 외로움, 결핍의 기억을 긍정적으로 품는 여유가 생겼다. 버거웠던 할머니가 착한 소녀로 보였다. 할머니의 딱한 인생도 보였다. 6·25 전쟁 때 남편 잃고 아들을 어렵게 키웠으니 애착이 얼마나 컸을까. 장남을 너무 사랑해 며느리와 손녀에겐 본심이 차갑게 나오지 않았나 싶다. 그제야 알았다. 할머니도 그만큼 힘들게 살아온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조금 거친 방식으로 손녀의 울타리가 되어주려 했던 것을.
할머니가 매일 기도해준 것도 생각이 났다. 받아들이니 숨지 않고 할머니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투병하신 할머니가 집에서 요양을 했는데 돌아가시기 전날 제가 거품 목욕을 시켜 드렸어요. 욕조에서 제 손을 꼭 잡고 좋다고 웃으셨는데 그런 예쁜 미소를 처음 봤어요. 냄새 나는 내복도 버리고, 예쁜 옷으로 갈아 입혀 드렸죠. 편하게 침대에서 잠을 재워드리고 ‘내일 올게요’라며 집을 나섰는데, 다음 날 새벽 4시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연락이 왔어요. ‘할머니, 고마웠어요’라는 생각 밖엔 안 들더라고요.”
>>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부모없는 아이들을 위해
깨우침을 얻고 활동하던 중, 부모없이 보육원에서 자란 여학생들을 품을 기회가 생겼다. 9년 전 한 천주교 신부가 부탁을 했다. 어려운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달라고. 아이들의 결핍을 채우는 일이었지만 처음엔 선뜻 응하지 못했다. “어쩌면 내 모습이 아이들에게 화려하게 보여질까 걱정되더라고요. 자기 처지와 비교가 될테고, 마음의 상처가 될까봐 망설여졌어요.”
2020년 신부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자신의 노력으로 경기도 가평에 ‘노비따스음악중고등학교’라는 대안학교를 개교했다는 소식이었다. 외면할 수 없었다. 전국 각지 보육원에서 모인 10대 소녀들 12명 중 노래에 관심이 있다고 한 4명을 품으로 들였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잖아요. 처음엔 저도 믿지 않더라고요. 선물을 사줘도 챙기지 못하고 잃어버렸어요. 자기 것을 챙겨본 경험이 없으니까요.”
소녀들은 기본적인 일상조차 낯설어 했다. 계절에 맞게 옷 입는 것부터 알려줬다. 그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된장찌개와 비빔밥을 만들어 먹였다. 집밥을 처음 먹는 모습이 안 쓰러웠다. 그러다 무심코 봤다. 아이들이 창밖으로 보이는 다른 아파트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것을. “세상과 벽을 치고 있더라고요. 사람과 눈을 마주친 경험도 없었고요. 그걸 하나씩 허물어주고 싶었어요.”
그들에겐 성악보다 삶을 가르친 것 같다. 이탈리아에도 데려가 넓은 세상을 보여줬다.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표정이 환해졌다. 올해, 4명 중 두 명이 이화여대와 삼육대 성악과에 합격했다. 출신 보육원에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누가 내 존재를 알아주고 ‘엄지 척’해주는 게 아이들에겐 처음이었다.
후원과 장학금을 모두 학교에 연결하고 있는 그는 말한다. “저도 아이들의 삶 하나 하나를 들여다보면서 배운 게 많아요. 성인 나이로 세상에 나갈 때 결핍이 느껴지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아이들이 세상에 어떤 사랑을 가져다줄지 기대돼요.”
>> 삶을 노래하는 미래는 ‘기적’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결핍을 메우는 계획을 줄지어 잡고 있다. 올해 6월 6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서 주연으로 나서고 7, 8월에는 유럽 공연 투어를 진행한다.
‘국창’ 임방울 선생의 울림은 세대를 건너 외손녀에게 이어져 또 어디론가 널리 스며들고 있다. 판소리에서 오페라로, 그리고 다시 자신의 DNA를 모르고 살아온 아이들의 목소리로.
“이렇게 삶의 울림을 노래로 전하면 세계의 소리로 가는 연결 고리가 되지 않을까요. 외국인들이 한국 특유의 한(恨)과 정(情)이 담긴 소리를 배워 부른다면 그게 진짜 케이 팝(K-POP)일 것 같아요.”
자신이 이탈리아 시골에서 원조 서양의 소리를 얻은 것처럼 말이다. 국악을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있다면, 한 번쯤 한국 시골에 가서 소들의 울음 소리를 들어보라고 얘기할 자격이 그에겐 있다.
“치열하게 부딪히고, 혹독하게 무너진 경험 덕분에 세상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노래가 풍성해졌어요. 우리 여성들은 여러 일을 할 수 있는 ‘멀티 태스킹’ 능력이 좋고 인내심도 강해요. 버티면 뭐든지 기적을 이뤄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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