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저택에서 독립선언의 장소로…인사동 전람회장의 변천사[청계천 옆 사진관]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4월 19일 13시 00분


백년사진 no. 109

● 100년 전에 전람회장 역할을 했던 서울 인사동의 건물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삶을 돌아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이번 주 신문(1925년 4월 13일 ~ 4월 19일)에는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이 많았습니다. 봄이 되니 행사도 많고, 자연히 카메라 셔터를 누를 일도 많아졌기 때문일 겁니다.

1925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7면 전체를 채운 ‘두만강 건너 북간도’ 사진과 관련 기사는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동아일보 기자 지방 순회 - 정면 측면에서 본 회령의 겉과 속”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당시 기자들이 권력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거침없이 지역의 현실을 기록한 점에서 눈에 띄었습니다. 워낙 방대한 내용이라 이 코너를 통해 전해 드리지 못해 아쉽습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권력에게 때론 무례하기도 한 기자정신을 개인적으로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일제 통치와 상관없이 사상계 교육계 경젝메 및 민간단체 들이 자체 활동하고 있는 상황을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흥미로운 사진들이 연이어 실렸습니다.
4월 13일자에는 영변 유치원의 보육증서 수여식 장면이 있었고,
4월 14일자에는 청량리의 봄 풍경,
4월 15일자에는 장충단 공원의 봄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4월 18일자에는 조선기자대회 관련 사진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제가 고른 사진은 ‘태화여자관 수예 전람회’입니다. 전람회 사진의 전형적인 구성입니다. 연출된 장면, 그리고 사진의 빈 공간을 관람객으로 채워 넣는 방식이 지금의 전시회 사진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평범한 앵글의 사진이지만, 100년 전 서울의 중심가 어디선가 전시회가 이뤄졌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규모야 작았겠지만 마치 서울 강남 코엑스나 일산 킨텍스, 부산 벡스코처럼 말입니다. 제 궁금증은 “전람회가 열린 저 건물은 무슨 건물이었을까?”였습니다. 관청이었을지 상업용 공간이었을지. 우선 당시 신문에 실린 사진의 설명을 살펴보겠습니다.

1925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


태화여자관 수예품 전람회 (1925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

시내 인사동에 있는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에서는 어제 18일에 강당에서 수예 전람회가 있었는데 장내 벽에는 순(純)조선 사람들의 힘으로 된 송고직(松高織)의 오색이 영롱한 필목이 늘어져 있어서 장내를 환하게 하였다. 출품은 노력을 짜서 공부하는 고학생들의 손으로 만든 것인데 한 살부터 십 세 이상의 남녀 아동의 양복을 미국식으로 만들어 걸려 있어서 보는 이의 눈을 황홀하게 하여 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리 만큼 탐이 나게 하며 그 외에 남녀의 속옷 와이삿즈, 침의, 침대홋이불, 전등 갓 등 여러 가지가 있었는 바, 다 바탕은 송고직이였고 다과점 같은 것도 있었는데 관람객이 자못 답지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더라.

● 친일 이완용의 저택에서 낭독된 독립선언문

사진의 실마리를 잡고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지난 주 독립운동가들 기사를 소개드렸는데, 사진 자체보다는 사진을 둘러싼 이야기와 역사를 좋아하시는 독자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도 사진을 통해 나타난 시대의 흐름과 사진의 맥락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진 속 건물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같은 이름의 건물이 새로 올려져 있습니다. 지금도 서울 종로구 인사동5길 29번지에 가면, ‘태화빌딩’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서 있습니다.

그 건물의 이름 속에는 우리가 잊고 지낸 100년 전의 시간들이 조용히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인사동 옛 순화궁 터에 있었던 태화여자관은 원래 친일파 이완용의 저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안순환이라는 인물이 이 집을 임대해 ‘태화관’이라는 요리집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 태화관 후원에 있던 ‘별유천지 6호실’에서 낭독된 독립선언문은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 미국 남감리회에서 사회 봉사 활동을 위해 건물 매입

3·1운동 이후, 이완용이 이 저택을 매물로 내놓았고 (혹자는 터가 너무 강해서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합니다) 이를 미국 남감리회 여선교부에서 매입한 뒤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1921년 ‘태화여자관’이라는 사회사업 기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이곳은 한국 최초의 사회복지재단으로 평가되며, 사회교육과 영유아 보건 사업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참고: 서울역사박물관 학술총서 제17권 『100년 전 선교사, 서울을 기록하다』)

이후 태화여자관은 근우회, YWCA, 조선여자청년회 등 여성운동 단체들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직업부인협회, 가정부인협회, 연합영아보건회, 연합아동보건회 등의 활동도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초기에는 여성의 교육과 자립을 돕는 시설로 출발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고아와 빈곤층을 위한 다양한 복지사업으로 이어졌습니다. 기독교 신앙 교육을 바탕으로 유치원, 탁아소, 성경학원, 요리 및 재봉 교육, 영어 교육까지 다양한 영역의 교육 활동을 펼쳤습니다.

● 서울 재개발로 빌딩으로 탈바꿈… 봉사는 명맥이어져

1939년에는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고 3층 석조 건물로 새롭게 지었고, 1978년 서울시의 재개발 계획에 따라 이 건물도 철거되고 오늘날의 태화빌딩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교육 기능은 1936년 ‘성신여학교’로 승계되었으며, 현재 태화복지재단은 인사동 태화빌딩 4층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이 재단은 전국에서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는 동시에,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도 활발한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참고 문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편, 『믿음의 흔적을 찾아』
김태은, 『3.1정신과 여성교육 100년』
태화복지재단 홈페이지

오늘은 서울 인사동 초입에 위치한 흰색 건물 안에서 100년 전 있었던 전람회 풍경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변천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의 풍경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머금고 있는 거였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 이야기에서 어떤 점을 느끼셨나요?

댓글을 통해 여러분의 생각을 함께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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