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 LG아트센터에서 파리오페라발레 소속 발레리나 강호현(27)이 안무를 선보이고 있다. 그는 “지금 주어진 것을 재밌게, 최대한 열심히 하는 것이 매일의 목표”라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7년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작품을 준비할 때 파트너 무용수를 도와 ‘지젤’ 역을 췄어요. 그땐 제가 ‘지젤’로 프로 무대에 설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죠. 어릴 적 동경하던 작품을, 그것도 파리오페라발레단 무용수로 고국 무대에서 춤을 추다니…. 무용수로서 꿈을 이룬 것 같아요.”
세계 최정상 발레단인 파리오페라발레(BOP)의 단원 강호현(27)을 서울 강서구 LG아트엔터에서 10일 만났다. BOP는 지난 8일부터 11일까지 이 공연장에서 1993년 이후 30년만에 ‘지젤’로 내한공연을 가졌다. 강호현은 앞서 퇴단한 김용걸과 에투알(수석무용수) 박세은, 콰드리유(군무단) 윤서후 등에 이어 BOP 내 4번째 입단한 한국인 무용수다. 2017년 입단 후 지난해 쉬제(솔리스트)로 승급했다. 올초 출산한 에투알 박세은은 이번 무대에 서지 않았다. BOP내 한국인 무용수 가운데 강호현만이 이번 서울 공연에 참여했다.
‘지젤’은 BOP가 1841년 세계 초연한 작품이다. 2막에서 처녀 귀신 윌리들이 시시각각 대열을 바꾸며 추는 ‘윌리들의 군무’는 백미로 꼽힌다. 강호현은 이 군무를 이끄는 선두 역할 ‘두 윌리’를 맡았다. 공기 속을 떠다니듯 가벼운 동작을 보여줘야 하는 배역이다. 그는 “다리는 아주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상체는 공기를 감싸 안 듯 부드러워야해 고난도”라며 “지난해 함께 쉬제로 승급한 클라라와 두 윌리 역을 논의하며 군무가 조화를 이루는 데도 신경을 많이 썼다”고 말했다.
‘지젤’ 2막에서 처녀 귀신 윌리들이 추는 ‘윌리들의 군무’ 장면. ‘백조의 호수’의 호숫가 군무, ‘라 바야데르’의 망령들의 왕국 군무와 함께 ‘3대 발레 블랑’(하얀 발레)으로 불린다. 파리오페라발레 제공.‘지젤’의 원조 발레단인 만큼 뼈를 깎는 연습이 수반됐다. 쉬제로서 군무와 솔리스트 안무를 모두 익혀야 해 모든 리허설에 참여했다. 리허설은 오후 12시부터 7시까지 이어졌다. 쉬는 시간은 30분 남짓에 불과했다. 리허설 전 몸 풀기 2시간은 별도다. 연습시간 외에 개인 운동까지 하는 동료들을 보며 그는 부족함을 느꼈다. 170cm를 훌쩍 넘는 단원들이 많아 167cm인 그는 척추부터 곧게 세워 ‘길게’ 춤추려고도 노력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담금질한 덕인지 가녀린 체구 속엔 곧은 심지같은 단단함이 느껴졌다.
“BOP에선 나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유기적인 조화를 중시해요. 연습할 때는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언제 또 힘든 시기가 오겠냐’며 힘듦을 즐기려고 하는 편이에요. 대신 미치도록 힘든 날엔 연습을 쉬고 발레단 친구들과 맛집에 가서 재충전합니다.(웃음)”
지난 연말 쉬제 승급과 군무 리더 발탁 등 호재가 이어졌음에도 그는 기뻐할 겨를조차 없었다. 케네스 맥밀런이 안무한 비극 발레 ‘메이얼링’ 주인공으로 무대에 오르는 동시에 승급 시험과 ‘지젤’ 준비까지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쁨을 만끽하기엔 남은 공연과 새로운 연습에 집중해야 했다”며 “승급 발표 때도 부모님께 제대로 된 연락을 못 드렸다”고 했다.
그는 “지젤은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등과 함께 꼭 한번 해보고 싶던 작품이었다”며 “어릴 적부터 항상 품어왔던 상상이기에 이번 투어의 일원으로서 춤을 추는 게 너무도 행복하다”고 했다. 원대연기자 yeon72@donga.com매일매일 해낼 것투성이지만 그에게 발레는 ‘행복해서’ 하는 일이자 삶의 일부다. 어릴 적 유난히 내성적인 성격 탓에 동네 스포츠센터에서 배운 발레가 마냥 좋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한 발레 학원에선 거의 살다시피 했다. 이후 예원학교, 서울예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치는 동안 실기 성적은 중간권에 그쳤지만 춤추는 게 즐거웠다. 그는 “내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가만 집중했다”며 “무용수의 최대 역량을 궁금해하는 BOP와 이 점에서 잘 맞았던 거 같다”고 했다.
그는 올해로 6년차 단원이 됐지만 연습실에 갈 때마다 설렌다고 했다. BOP의 주된 공연장이자 19세기에 지어진 유서 깊은 오페라 하우스인 팔레 가르니에를 보면서는 ‘대단한 사람들과 춤을 추고 있구나’를 다시금 실감하고 감사해한다.
“한국 관객 분들께 아직 보여드리지 못한 BOP만의 레퍼토리가 정말 많아요. 다음번엔 그런 작품과 배역으로 돌아오고 싶습니다. 어떤 배역이냐고요? 전부 하고 싶어서 도저히 고를 수가 없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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