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캐’는? [고양이 눈썹 No.37]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9월 24일 16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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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캐·부캐’는 게임 용어입니다. 본(本·으뜸)캐릭터, 부(副·버금)캐릭터를 이릅니다. ‘부캐’라 하면 본업 외에 다른 일을 뜻하죠. 40대 이상 중장년들은 ‘부업’ ‘사이드잡’ ‘취미’ ‘취향의 세계’ 등으로 부르지만 30대 이하 청년세대는 ‘사이드 프로젝트’ ‘N잡’ ‘세컨드 라이프’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즉 부캐는 꼭 일이나 돈벌이만을 지칭하지는 않습니다. 몰입감 좋은 취미와 버킷리스트 활동도 부캐에 포함되죠. 종교·봉사 활동도 포함됩니다. 더 넓은 개념입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힐링 산업이 한 때 유행한 적이 있죠. 저는 이런 시각이 좀 원망스럽더군요. 상처도 사회로부터 받는데, 치유하는데 또 돈을 사회에 써야 하니….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고.

그래서 일까요. 최근엔 ‘힐링’이란 단어가 많이 안 쓰입니다. ‘힐링’도 유행을 타나 봅니다. 대신 긍정적으로 부캐를 창출해 새로운 나만의 세상을 여는 분들이 늘고 있습니다. 굳이 힐링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이죠. 모든 부캐 활동은 생산적입니다. 취미라 해도 뭔가를 만드는 일일 수도 있고, 운동 등으로 건강을 증진해도 몸이 튼튼해지니 생산적이죠. 봉사활동도 서비스를 창출하는 행위이고요. 뭔가를 배우는 것도 역시 생산 활동입니다.



▽사진기자들은 사진 애호가들로부터 ‘부럽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니 얼마냐 좋으냐는 것이죠.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사진은 취미와 재미로만 하세요. ‘업자’가 되면 스트레스에요.”

지인 중에 취미로 피아노를 치다가 전문가 경지에 오른 분이 있습니다. 실력이 아까워 주말마다 교회 등을 다니며 봉사를 시작했는데요, 막상 ‘일’처럼 되버리니 압박감이 엄청 났습니다. 조금이라도 늦게 가면 연습시간에 늦어 성가대원들이 기다리니 미리 가야하고, 지휘자와도 사사건건 미묘한 갈등이 생기더랍니다. 교회 측에서는 은근히 홀대해 부아도 치밀었고요. 그러면서도 평소에 미리미리 연습은 해둬야 했고요. 그렇게 1년가량을 지내니 피아노 근처에 가기도 싫어져 결국 모든 봉사활동을 접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 하루가 지난 그 다음날부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피아노가 너무 치고 싶어졌고, 연주가 다시 신나고 즐거워졌다고 합니다. 책임감에서 해방되자마자 연주의 기쁨에 몰입할 수 있게 된 것이죠. 불과 24시간 만에 말이죠.


▽누구에게나 본업은 생계를 유지하고 자아실현에 도움을 주는 매우 유용한 도구이자 ‘나의 일생’ 자체이기도 하죠.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냉정합니다. 9개를 잘 하다가도 1개를 실수하면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곳이 직업의 세계입니다. 일을 잘 하고 있다가도, 엉뚱한 곳으로 인사발령이 나면 갑자기 ‘무능력자’가 돼버리기도 합니다. 낯선 자리에 가서 처음부터 다시 일을 배워야 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본업의 이면에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우울함에 빠지기 쉬운 환경이 있기도 합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 하는 것이라 해도 능력과 책임에 대한 괴로운 부담이 반드시 있죠.

▽부캐는 그렇지 않습니다. 편하고 가볍고 ‘쿨’합니다. 잘 안 되도 그만인 ‘베타’ 테스트입니다. 시도 자체만으로도 재미있습니다. ‘현실(생계)’을 잠시 벗어나 ‘비현실(낭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프로 축구 선수가 결정적인 실수를 하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선수로서 기세가 꺾이기도 하지만, 일반 회사원이 공을 좀 찰 줄 알면 ‘축구도 잘 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진기자가 사진을 잘 못 찍거나 ‘물을 먹으면’ 망신스럽습니다. 하지만 아마추어 사진작가가 좋은 사진을 하나 건지면 ‘다재다능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부담이 없죠.



▽자존감과 자괴감은 맞닿아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입니다. 자존감이 클수록 자괴감도 크게 느끼죠. 둘은 상호작용을 합니다. 자기 업무에 대해 자존감·자부심이 큰 사람은 실수를 하거나 성과가 안 좋을 때 자괴감을 그만큼 크게 느낍니다.
본업에서 상실감 배신감 억울함을 경험하게 되면 내가 처한 환경을 바꾸고 싶어 약이 바짝 오르기 마련입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을 때 오히려 부캐를 만들고픈 강한 동기 부여가 됩니다. 본캐·부캐도 상호작용을 합니다. 부캐는 본캐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해줍니다. 부캐는 본인이 좋아 선택한 일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기주도성과 자신만의 자체 질서를 갖는 공간입니다. 자괴감을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잘 안되면 접어버리면 그만이니까요. ‘밑져야 본전’, ‘무조건 남는 장사’지요. 굳이 ‘공식 데뷔’할 필요가 없는 콘텐츠입니다.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니까요.

부캐에 몰입하는 분들은 즐거움도 늘고 덩달아 자존감이 올라갑니다. 자신감은 본캐 업무에도 영향을 줍니다. 더 자신감을 갖고 임하게 되니 성과가 향상됩니다. 상호작용이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것이죠. 물론 시간이 지나 부캐가 본캐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직업으로 전환되는 것이죠. 이 경우 부캐가 또 다른 현실이 되며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그 때 가서 다른 부캐를 또 찾으면 되지요.

▽부캐 상태에선 마치 물리학의 평행우주론처럼 다른 세계로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듭니다. 출입도 자유롭습니다. 본캐 세계에 있다가 언제든지 부캐로 가고 또 나오고…. 2개의 삶을 사는 모양새지요. 나의 질서, 내 영향력, 나의 주도권, 내 고유의 질서 즉 나만의 세상입니다. 부캐는 행복의 필요조건인 자기결정권이 넘치는 시공간입니다. (8월13일자 고양이눈썹 ‘자기결정, 행복의 필요조건’ 참고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20813/114943757/1)

여러분의 부캐는 무엇입니까.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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