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문학 서가에서 인생책을 만날지도[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9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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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밤/루리 글, 그림/144쪽·1만1500원·문학동네

최근 우연히 30대 지인 2명의 책장을 구경하다가 똑같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오랜 고전도 유명 작가도 아니었다. 그저 어린이 동화. 온라인서점엔 초등 5, 6학년이 읽기에 적합하단 설명이 올라와 있다. 그런데 그들은 “감동적” “강추(강력 추천)”라며 칭찬을 쏟아냈다. 한국 작가 루리의 ‘긴긴밤’이란 책이다.

이야기는 길지 않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흰바위코뿔소 ‘노든’과 버려진 알에서 태어난 어린 펭귄이 주인공. 코끼리 고아원에서 지내다 험난한 세상으로 발을 내디딘 노든은 자유와 행복을 맛보다가 어느 날 동물원에 갇힌다. 그곳에서 펭귄과 만나 친구가 된 뒤 둘은 수없는 긴긴밤 동안 얘기를 나눈다. 코뿔소와 펭귄은 마침내 동물원을 빠져나가 바다에 가기로 하는데…. 아무리 힘들어도 둘은 포기하지 않고 길을 걷는다.

이호재 기자
이호재 기자
신기하게도 이 동화에 달린 리뷰를 살펴보면 유독 성인 독자들의 호평이 많다. “아이가 좋아해요”류가 아니다. “애 보라고 샀는데 제가 울었어요.” 지난해 2월 출간된 뒤 지금까지 20만 부가 넘게 팔렸는데, 성인 독자들이 서로 추천하며 구매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출판사의 귀띔이다.

만화영화도 어른들이 더 좋아할 때가 많지만, 동화책은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 송수연 아동문학평론가의 평대로 “문학의 영원한 화두인 ‘나는 누구인가’를 다뤘기” 때문일까. 자신의 뿌리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고 싶은 마음은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우린 스스로 누구인지를 묻는 경우가 잦아진다. 그런 원초적인 고민을 건드린 게 성인 독자의 마음에 공명을 울렸을지도.

한 가지 더 눈여겨볼 대목은 이 책에 담긴 사회적 메시지다. 노든은 2018년 아프리카 케냐의 자연보호구역에서 45세로 영원히 잠든 마지막 수컷 북부흰코뿔소 ‘수단’이 모델. 또 루리 작가는 베트남전쟁 때 미군이 투하한 폭탄 탓에 웅덩이가 파이고 빗물이 고인 베트남의 ‘폭탄연못’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도 한다. 환경을 파괴한 인간의 원죄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묻어 있는 점이 어른들의 눈높이를 충족한 것 아닐까.

최근 한 아동문학 작가에게 들은 하소연이 있다. “우리나라는 유난히 아동문학을 아이들만 읽는 작품으로 한정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너무 ‘뻔한 교훈’과 빡빡하게 들이민 ‘학습용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성이 강하다는 지적이다. 동화책을 하나의 완성된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위기도 한몫한다. 이수지, 백희나 등 해외에서 극찬받는 작가들의 작품도 우리나라에선 ‘아동도서’로만 취급받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좋은 작품은 독자의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프랑스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1900∼1944)의 ‘어린 왕자’는 영원한 어른들의 동화다. 영국 작가 조앤 K 롤링(57)의 ‘해리포터’ 시리즈에 열광하는 건 성인들이 더하다. 어쩌면 가벼이 넘어갔던 아동문학 중에 우리네 인생을 보듬어줄 숨은 명작이 있었던 건 아닐까. 얼른 서점 아동도서 코너에 가서 책을 펼쳐 봐야겠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동화#아동문학#긴긴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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