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감춰야 했던 역사속 그 순간들이 나를 잃어버린 지금의 우리에게 묻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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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극 ‘불가불가’ 30여년만에 공연
소신 잃은 현대인의 내면 파고들어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연습실에서 7일 진행된 리허설에서 계백장군 역을 맡은 배우 정홍구(오른쪽)가 장검을 들고 내리치는 장면을 연기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연습실에서 7일 진행된 리허설에서 계백장군 역을 맡은 배우 정홍구(오른쪽)가 장검을 들고 내리치는 장면을 연기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7일 연극 ‘불가불가’ 리허설이 한창인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2층 연습실. 계백장군 역의 배우 정홍구가 장검을 들고 서 있다. 이철희 연출가는 그를 향해 “전쟁에 나가기 전 아내를 죽이는 연기에 몰입하지 못하고 있다”고 다그쳤다. 이어진 다음 장면. 구한말 조정대신 역을 맡은 배우 주성환에게 을사늑약 체결에 동의를 구하는 일본인 조선 총독이 묻는다.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조약을 체결하는 게 맞는가.” 이에 주성환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연신 ‘불가불 가(不可不 可·불가피하니 가능하다)’ 혹은 ‘불가 불가(不可 不可·절대 불가하다)’를 읊는다. 지켜보던 계백장군은 손에 쥔 장검을 머리 위로 올려 조정대신의 목을 내리친다.

1980년대 정치적 탄압으로 소신을 밝힐 수 없던 사회 분위기를 풍자한 연극 ‘불가불가’가 30여 년 만에 재탄생한다. 26일부터 서울시극단이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선보이는 연극 ‘불가불가’의 희곡은 극작가 이현화가 썼다. 이 작가는 이 작품으로 1988년 동아연극상 희곡상을 받았다.

각색은 연극 ‘조치원 해문이’ ‘닭쿠우스’ 등으로 알려진 이철희 연출가가 맡았다. 작품엔 황산벌전투 무신정변 임진왜란 병자호란 을사늑약 등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소신을 밝히지 못하는 개인이 차례로 등장한다. 1980년대와는 달라진 지금의 사회상도 반영했다. 그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려고 했다”고 말했다.

한자어로 쓰인 대사를 한글로 바꾸는 작업도 필요했다. ‘희(희)는 희인 것을’이라는 표현을 ‘장난은 장난인 것을’로 고치는 식이다. 각색 장면 중 대표적인 건 일본군이 독립군의 아내를 전기로 고문하는 장면이다. 1980년대 연극에서 공중에 매달린 반라의 여성이 전기고문을 당하는 장면은 논란을 빚었다. 이 연출가는 “여성 배우를 대하는 방식에 문제는 있었지만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순 없었다”며 “독립군의 아내가 고문을 당하는 설정은 그대로지만 고문 시연만 남성 배우가 대체하는 장면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극의 강렬한 특징으로 꼽힌 ‘커튼콜 없는 엔딩’도 바뀐다. 배우가 외치는 한 줄 대사로 끝나는 연극은 당시 관객들에게 강한 여운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엔 공연을 마친 후 배우들이 나와 인사하는 시간을 가진다. 26일∼4월 10일, 3만∼5만5000원.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불가불가#풍자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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