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판사’ 문유석 작가 “코로나로 변한 세계 담아… 일종의 사고 실험”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6일 13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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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마술사’ ‘흥행 보증수표’ 따위의 흔한 말이 붙는 드라마 작가들 사이, 문유석(52)에게는 꼭 ‘판사 출신’이란 수식이 붙는다. 그는 드라마 작가로 데뷔하기 전 ‘개인주의자 선언’, ‘판사유감’ 등의 책을 통해 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였다는 사실이 대중에 각인됐다. 드라마 데뷔작인 ‘미스 함무라비’(2018년) 역시 강강약약인 이상적인 법원을 꿈꾸는 초임 판사 박차오름(고아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는 사례들과 판사들의 고민을 다뤘다.

그런 그가 3년이 지난 올해에는 조금 더 작가적 상상력을 담은 드라마를 만들었다. 지난달 22일 종영한 tvN ‘악마판사’는 “시작하는 입장에서 우선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쓴 것일 뿐, 코미디, SF, 정치물, 사극, 애니메이션까지 경계 없이 다양한 이야기를 써 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는 문유석의 작가적 도전이 더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판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법정물이긴 하지만 전 국민이 참여하는 라이브 법정 쇼, 디스토피아 대한민국 등 가상의 요소가 주가 됐다.

악마판사는 한 재단이 국가를 장악한 대한민국에서 적폐들과 맞선 판사 강요한(지성)의 이야기를 담는다. 강요한은 금고 235년형, 태형 등 파격적인 재판으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다. 문 작가는 서면 인터뷰에서 “미스 함무라비 방영 당시 완전히 반대되는 톤의 이야기를 써보면 어떨까 생각해 마련한 작품”이라면서도 “톤 앤 매너가 다를 뿐 사실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이야기다. 박차오름이 당했던 핍박과 고난을 떠올려 보시면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장밋빛은 아니지 않냐”고 했다.

작품 속 세계는 시민들의 건강한 연대 따위를 기대할 수 없다. 나라를 휩쓴 역병과 이에 따른 경제 붕괴로 사회 불만이 극에 달해 약탈과 폭동이 벌어진다. 급기야 막말을 일삼는 유튜버 허중세(백현진)가 인기를 끌며 대통령까지 된다. 문 작가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스페인 요양원 노인 방치 사건, 트럼프 지지시위대의 국회의사당 습격 등 세계가 한 순간에 달라지는 걸 보며 무서움을 느꼈다”며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어떨까를 생각하다가 ‘블랙 미러’나 ‘브이 포 벤데타’ 같은 근 미래 디스토피아물처럼 일종의 사고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재판 곳곳엔 우리네들 현실 사건이 반영되기도 했다. 역병이 퍼졌다는 이유로 빈민촌 주민들을 탄압하려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주민 폭행을 앞장선 추종자 죽창(이해운)의 재판이 대표적이다. 죽창은 재판에 앞서 선언문을 낭독하는데, 그 첫 마디인 “신념을 가진 한 사람은 이익만을 좇는 백만 명의 힘에 맞먹는다”는 2011년 노르웨이에서 77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극우 테러리스트 브레이빅의 트위터 내용에서 따 온 것이다.

극 중 사이다 재판은 통쾌함을 선사하면서도 강요한 식의 극약 처방이 옳은 정의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결국 허중세 등 적폐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대신한 자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난 이제 뭘 해야 할까? 요한이 필요없는 세상을 위해서”라 독백하는 판사 가온(진영)의 대사는 작가의 고민과 맞닿아있다. 문 작가는 “아직 늦지 않았으니 그런 세상을 만들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며 “시민들은 정치, 사법, 언론 등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 다크 히어로가 돼주길 원하는 게 아니다. 그저 자기 할 일을 묵묵히 잘 해 다크 히어로가 필요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어주길 바랄 뿐”이라 말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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