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0원 시집이 900만원으로… 국내 문학작품 첫 NFT 경매 낙찰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7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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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연 시집 ‘쥐와 굴’ NFT 변환
종이책 대신 디지털 소유권 부여
배 씨 “예상보다 고가 낙찰 놀라… 모든 문화예술품으로 확대될 것”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배수연 시인.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종이책 시집 ‘쥐와 굴’을 노트북 화면 안에 비친 NFT로 변환한 뒤 경매를 통해 판매했다.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배수연 시인.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종이책 시집 ‘쥐와 굴’을 노트북 화면 안에 비친 NFT로 변환한 뒤 경매를 통해 판매했다.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직사각형의 이미지 안에 시집 96페이지가 하나하나 펼쳐져 있다. 가운데엔 진한 갈색과 옅은 갈색으로 그린 쥐의 얼굴이 있다. 왼쪽 위엔 출판사 현대문학을 상징하는 로고 ‘H’, 오른쪽 아래에는 배수연 시인(37·여)의 서명 ‘ㅂㅅㅇ’이 보인다. 이 이미지의 정체는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배 시인의 3번째 시집 ‘쥐와 굴’(현대문학) 1쇄. 디지털 작품의 가치와 소유권을 증명하는 대체불가능토큰(NFT·Non-fungible token)으로 발행된 뒤 한국 문학작품 최초로 NFT 경매를 통해 판매됐다.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배 시인은 새로운 흐름에 발 빠르게 움직이는 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그는 노트북에 무선 인터넷을 연결하는 데 헤맸고 인터넷에 접속하다 오류가 날 땐 당황했다. 천생 시인처럼 정확한 단어를 고르려 자주 머뭇거렸고 내용을 확신하지 못하면 말을 끝맺지 않았다. 옛것만 좋아할 것 같은 그에게 왜 최첨단 기술인 NFT를 이용해 경매를 열게 됐는지 묻자 그는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큰돈을 벌려고 한 일은 아니에요. 문학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죠. 나중에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백과에 ‘한국 문학작품 최초의 NFT 경매’라고 한 줄 올라오면 의미 있다고 생각했죠.”

그가 올 2월 시집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을 때만 해도 NFT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올 3월 블록체인 회사 인젝티브프로토콜이 ‘얼굴 없는 화가’로 유명한 영국의 미술 작가 뱅크시의 그림 ‘멍청이(Morons)’를 NFT로 변환해 경매에 내놓고, 인젝티브프로토콜 관계자로 추정되는 이들이 진짜 그림은 불태우는 사건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이 그림은 가상화폐인 이더리움(ETH)으로 228.69ETH(판매 당시 4억3000만 원)에 팔렸다. 그는 “영화 ‘매트릭스’(1999년)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연기한 주인공 네오는 진짜 세상을 뜻하는 빨간 약과 가짜 세상을 뜻하는 파란 약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 하지만 이제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진짜, 가짜 구분이 없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문학계에서 NFT 경매를 해본 이는 없다. 해외에서도 미술, 음악 분야는 NFT가 활성화되고 있지만 문학계의 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결국 배 시인은 NFT 경매 방법을 설명해주는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며 공부했다. 출판사가 서점을 통해 시집을 판매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작가가 스스로 NFT 경매를 진행하기로 했다.

5월 25일 0시 배 시인은 세계 최대 NFT 경매사이트인 오픈시(OpenSea)에서 경매를 열었다. 경매 기간과 시작 및 마감 시각은 진행하는 이가 원하는 대로 정할 수 있고 해당 기간에는 24시간 경매가 계속된다. 누가 관심이나 가질까 하는 우려와 달리 경매 시작 8시간 만에 한 참가자가 1.2ETH를 제시했다. 경매는 배 시인이 정한 6월 5일까지 이어졌고 마감 시간 30분을 남기고선 두 참가자가 경쟁하듯 가격을 올렸다. 총 8차례 경매 입찰이 이뤄졌고, 마침내 5일 오후 3시 반 한 참가자가 2.94ETH에 ‘쥐와 굴’ 1쇄 NFT 파일을 샀다. 낙찰일 기준으로 약 900만 원이다. 종이책 정가 9000원의 1000배인 셈. 배 시인은 NFT 경매 수익을 미얀마 민주화운동 단체에 기부할 예정이다. 그는 “생각보다 높은 가격에 낙찰돼 깜짝 놀랐다”며 “아이디만 알 뿐 누가 NFT 낙찰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문화예술이나 NFT에 관심이 많은 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누군지 궁금해 죽겠다”고 했다.

시인이 시집을 팔아 밥벌이하기 힘든 시대다. 배 시인 역시 중학교 미술 교사로 일하며 새벽에 시를 쓰고 있다. 배 시인은 2013년 등단 후 낸 두 권의 시집인 ‘조이와의 키스’(민음사·2019)와 ‘가장 나다운 거짓말’(창비교육·2019)의 인세로 총 900만 원을 벌었다. 이번 NFT 경매 수익과 같다.

NFT 경매는 잠깐 스쳐가는 유행이지 않을까. 기자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지금도 시는 시장에서 돈으로 거래되고 있어요. ‘쥐와 굴’은 1쇄만 NFT로 팔았고 2쇄는 종이책으로 만들어 서점에서 9000원에 판매하고 있죠. 모든 문화예술품이 NFT로 변환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여요. 예를 들어 가수 아이유 행동 하나하나에 팬들이 환호하는데 아이유가 윙크하는 움짤(움직이는 짧은 영상)이 NFT 경매로 나올지 누가 알겠어요. 지금은 제가 쓴 시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미술작품을 만들고, 미술작품을 사진으로 찍어 변환한 NFT 파일을 경매로 내놓으려 준비 중이에요.”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시집#900만원#경매 낙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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