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강물의 ‘녹색물결’ 세상 모든 이별을 담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입력 2020-11-19 03:00수정 2020-11-19 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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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를 영화로 읊다]<4> 눈물의 빛깔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비밀 실험 대상인 괴생명체와 사랑에 빠진 청소부 엘라이자. 그는 죽을 위기에 처한 괴생명체를 탈출시켜 물속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원치 않는 이별을 한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영화가 하나의 선명한 색채 이미지로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다. 한시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고려 정지상(鄭知常·?∼1135)의 ‘임을 보내며(送人)’를 다른 방식으로 읽어보자.

마르지 않는 대동강물처럼 끊임없이 불어나는 이별의 슬픔을 표현한 시다. 비 갠 뒤 짙어진 초록 풀빛으로부터 시작해 해마다 눈물 더해져 불어나는 녹색 물결로 마무리된다. 이 ‘녹색 물결(綠波)’은 이제현(李齊賢·1287∼1367)이 나중에 수정한 표현이다. 마지막 구는 다시 첫 구절로 이어진다고 해도 좋다. 대동강변은 평양사람들의 이별 장소였기 때문이다.

시에는 관습적인 이별의 이미지와 클리셰가 등장한다. 봄풀(春草)과 남포, 그리고 ‘남포에서 그댈 떠나보내며(送君南浦)’ 등이 그렇다. 그러나 소리와 색채의 관계에 주목해 시를 읽어보면 색다른 면모가 드러난다. 한자는 글자마다 평(平) 상(上) 거(去) 입(入)의 성조가 있는데 한시의 리듬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중국과 달리 낭송할 때 측성(仄聲·상 거 입성)을 평성(平聲)에 비해 높고 길게 읽었다. 이 시에선 ‘초색(草色)’ ‘녹(綠)’ ‘눈물(淚)’을 나타내는 글자가 모두 측성이다. 읊조려보면 음의 높낮이와 길고 짧음의 엇갈림 속에 절로 초록빛과 눈물이 부각된다. 이다지도 눈물과 녹색이 넘쳐나는 시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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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과 눈물이 인상적인 영화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2017년)가 있다. 괴생명체와의 사랑이란 독특한 주제에도 사랑과 이별이라는 고전 영화의 익숙한 향취가 배어난다. 마지막에 주인공들이 비 내리는 물가에서 이별하는 장면이 그렇다. 영화에선 녹색만이 아니라 붉은색도 중요하게 사용되지만, 주인공들의 비극적 이별과 영원할 사랑만큼은 모두 녹색의 물에 담긴다. ‘임을 보내며’ 역시 물과 눈물을 오가며 녹색으로 우리 앞에 펼쳐진다.

조선 후기 심노숭(沈魯崇·1762∼1837)은 아내와 사별한 뒤 쓴 ‘눈물이란 무엇인가(淚原)?’에서 눈물의 근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질문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눈물이 대상과의 교감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환기시키는 화두(話頭)였을 뿐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정지상의 시에서도 우리는 “대동강 물은 언제나 마르려나?”라는 물음과 맞닥뜨린다. 이별의 눈물이 보태져 마르지 않는다는 과장된 설명은 답이 아니다. 문답은 눈물의 정서적 진폭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사(修辭) 전략일 뿐, 읽는 이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저 눈물의 간절함에 공감하는 일이다.

영화 속 여주인공 엘라이자와 괴생명체의 사랑과 이별은 낯설다. 관객은 처음엔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차츰 두 생명체의 사랑에 공감하게 되고, 결국에는 그들의 이별에 함께 눈물짓게 된다. 반면 한시 속 눈물은 평범해 보이지만, 세상 모든 이별의 눈물을 담을 수 있을 만큼의 포용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읽는 이들은 녹색 물결 속 누군가의 애절한 눈물에 시나브로 젖어 들고, 녹색은 마침내 눈물의 빛깔이 되어 시 전체를 녹색의 이미지로 휘감는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임을 보내며#정지상#셰이프 오브 워터#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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