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의 화려함 뒤엔, ‘미생’들의 분투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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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페이지 연재 야구만화 ‘프로야구생존기’ 최훈 작가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프로야구 경기와 선수 관련 내용을 분석적으로 보여주는 만화를 그려온 최훈 작가는 “어릴 때부터 원인과 결과가 딱딱 맞게 정리되는 수학을 좋아했다. 나이들수록 세상사가 논리적이지 않다는 걸 깨달아 가며 만화도 변해 가는 듯하다”고 했다. 오른쪽은 ‘프로야구생존기’ 최근 에피소드. 카카오페이지 제공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프로야구 경기와 선수 관련 내용을 분석적으로 보여주는 만화를 그려온 최훈 작가는 “어릴 때부터 원인과 결과가 딱딱 맞게 정리되는 수학을 좋아했다. 나이들수록 세상사가 논리적이지 않다는 걸 깨달아 가며 만화도 변해 가는 듯하다”고 했다. 오른쪽은 ‘프로야구생존기’ 최근 에피소드. 카카오페이지 제공
“프로야구 선수들이 정말 ‘열광적 응원 속에서 화려하게 사는 사람들’일까? 야구만화를 그려온 덕분에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눠본 선수들은 그저 매순간을 버텨내기 위해 정신없이 분투하는, 나와 똑같은 사회인들이었다. 그들 모두를 주인공으로 삼은 만화를 그리고 싶었다.”

최훈 작가(48)가 웹툰 플랫폼 카카오페이지에 연재 중인 ‘프로야구생존기’는 윤태호 작가의 ‘미생’ 속 회사원들의 악전고투를 연상시키는 야구만화다. 남다른 주력(走力)을 인정받아 서울 연고 프로야구팀 트라이아웃(공개 선수 평가)에 합격한 외야수 노영웅이 일단은 주인공. 하지만 그를 둘러싼 다른 선수들의 사연을 매회 돌아가며 촘촘하게 엮어낸다.

최훈 작가의 최근작 작업 모습. 웹툰이라는 단어가 생기기 전에 온라인
만화 연재를 시작한 그는 앞으로 그림 작가들과 협업한 스토리텔링 작업
에 주력할 계획이다. 카카오페이지 제공
최훈 작가의 최근작 작업 모습. 웹툰이라는 단어가 생기기 전에 온라인 만화 연재를 시작한 그는 앞으로 그림 작가들과 협업한 스토리텔링 작업 에 주력할 계획이다. 카카오페이지 제공
야구를 잘하는 선수는 많지만 주전을 꿰찬 선수는 극소수다. 그렇기에 노영웅을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은 제한된 기회 속에서 저마다의 장점을 어떻게든 극대화해 드러내는 데 사활을 건다. 위태위태한 생활전선에서 살아남으려고, 속한 조직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부딪치며 성패의 롤러코스터를 탄 채 처음과 다른 인물로 변해간다.

“늘 스토리 구상 단계에서 인물들의 캐릭터 설정을 꼼꼼히 해놓는 편이다. 노영웅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 큰길은 정해져 있다. 굽이굽이마다 적절한 다른 인물을 선택해 그 길목의 중심점에 풀어놓는다. 그가 찾아가는 길을 따르며 그림으로 옮기는 거다. 그렇게 더해지는 이야기는 노영웅을 돋보이게 만드는 장치가 아니다. 이 만화는 모든 인물들의 생존기이니까.”

잠재력을 자각하지 못했던 노영웅은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라”는 선배 이어로의 조언을 계기로 차츰 성취를 쌓아간다. 일반적 효율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무조건 초구 도루’라는 도박을 건 것. 빠른 스타트를 포기하고 극단적으로 큰 리드를 잡은 뒤 오로지 견제구에만 대비하는 노영웅의 스타일은 일본 프로야구 선수(현 코치) 혼다 유이치(本多雄一)를 참고한 것이다. 최근 에피소드는 그런 노영웅을 보며 ‘벼랑 끝에 서 있는 건 은퇴를 앞둔 나 자신’임을 씁쓸히 곱씹는 이어로의 속내를 짚었다.

“LG 채은성과 이천웅, 키움 서건창 선수와 대화하며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모두 2군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다 차츰 빛을 본 선수들이다. 능력은 뛰어난데 주목받지 못해서 신고선수로 들어왔다가 부상으로 방출된 적도 있고…. 프로야구는 잔인하다. 유명하지 않으면 오래 안 본다. 못하면 바로바로 자르니까 무명 선수는 한두 번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다. 2군에서 오래 살아남았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지켜볼 만한 능력을 가졌다고 봐야 한다.”

최 작가는 프로야구 원년 팬이다. LG의 전신인 MBC 청룡의 이종도 하기룡 선수, 허영만 작가의 야구만화에 열광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만화를 좋아하는 부친의 지원에 힘입어 일본으로 만화 유학을 다녀온 뒤 ‘MLB카툰’으로 이름을 알렸다. ‘프로야구카툰’을 통해 경기 안팎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했던 그는 “팬으로서 FA(자유계약) 제도가 서둘러 개선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야구는 수십억 연봉의 스타들만으로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FA 보상선수 부담을 없애고 계약기간을 줄이면 더 많은 선수가 자유롭게 팀을 옮길 수 있다. 노영웅만큼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수많은 선수들에게 그런 찬스가 주어지길 희망한다. 야구팬들의 응원 속에는, 일상이라는 경기장에서 얻지 못한 기회에 대한 아쉬움이 숨어 있을 거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야구만화#프로야구생존기#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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