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이 얼룩은 알고 있다, 당신의 내면세계를

최고야 기자 입력 2020-08-15 03:00수정 2020-08-1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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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샤흐/데이미언 설스 지음·김정아 옮김/627쪽·2만8000원·갈마바람
스위스 정신과 의사인 헤르만 로르샤흐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은 심리검사 로르샤흐의 검사 카드. 추상적인 무늬의 잉크 문양을 보고 떠오르는 대로 말하다보면 피검사자의 무의식이 반영된 내면세계를 추정할 수 있다. 갈마바람 제공
2000년대 초반 11월의 어느 날 미국 시카고.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직장에 지원한 남성 빅터 노리스는 채용의 마지막 관문으로 심리검사를 받게 됐다. 호감을 주는 외모의 노리스는 유쾌한 말투로 검사에 임했다. 노리스가 받은 검사는 가장 널리 쓰이는 성격 검사로, 567개 문항에 ‘예’ ‘아니요’로 답하는 미네소타 다면성격 검사(MMPI)와 특정 상황이 묘사된 그림을 보여주고 느낀 대로 서술하게 하는 주제통각검사(TAT) 등이었다. 노리스는 다소 예측 가능하고, 뻔한 모범답안을 내놨고 앞서 모든 검사를 무난히 통과했다.

문제는 로르샤흐 검사에서 터졌다. 잉크를 종이 한쪽에 흘리고 데칼코마니처럼 좌우 대칭을 이루도록 찍어 낸 추상적인 문양의 검사 카드를 보며 노리스는 앞서 검사에서 의도적으로 숨겨왔던 본능을 드러냈다. 맥락도 없고, 명확한 답도 없는 잉크 문양을 보며 노리스가 생각한 대로 답한 건 아이들과의 폭력적 성행위, 여성 살해 등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처럼 모호한 그림 앞에서 자신의 심리상태를 여과 없이 드러낸 것이다.

로르샤흐 심리 검사를 직접 받아보지 않았더라도 로르샤흐 검사의 잉크 문양을 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노리스의 사례에서처럼 모호하고 추상적인 그림을 보며 각자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무의식을 투영해 내는 게 로르샤흐 검사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 때문에 저자는 로르샤흐 검사 카드 10장에 대해 ‘인류가 가장 많이 해석하고 의미를 분석한 그림’이라고 정의한다.

로르샤흐 검사는 스위스 정신과 의사이자 아마추어 예술가였던 헤르만 로르샤흐(1884∼1922)가 개발했다. 로르샤흐가 이 검사를 개발한 1917년은 지크문트 프로이트, 카를 융 등 근대 심리학 거장들이 자신만의 이론을 정립해 양 진영으로 나뉘어 첨예한 논쟁을 이어가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로르샤흐는 자신만의 잉크얼룩 그림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해 갔다.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추상예술 사조에 영향을 받은 덕이었다. 로르샤흐는 잉크 그림을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에 관심을 기울였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체계적인 심리검사 세트 한 벌을 만들어 냈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로르샤흐 검사를 대체할 만한 잉크 그림을 만들어 내기 위해 도전했지만, 정신과 의사이자 뛰어난 예술적 감각으로 시각 경험과 심리적 요인의 관계성을 밝히기 위한 로르샤흐의 열정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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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샤흐 사후에 검사가 널리 알려지면서 학계에서는 많은 논쟁이 있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심리학계에서 가장 많이 활용하는 심리 검사 중 하나로 자리 잡긴 했지만, 일명 ‘영혼을 투시하는 X선’ 같은 말처럼 과장된 것도 사실이다. 검사자에게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는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신뢰성을 공격받기도 했다.

로르샤흐 검사 카드는 문양이 주는 감각적 특성 때문에 심리검사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때로는 미국 뉴욕 고급 백화점 쇼윈도의 배경이나 팝스타의 뮤직비디오에서 디자인 소재로 활용되기도 한다. 다만 여전히 심리검사에 그대로 쓰는 그림이기 때문에 대중에 널리 노출되는 게 결과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많다. 하지만 저자는 훈련된 검사자 없이 로르샤흐 검사지 카드를 보며 나름의 심리적 상태를 유추해 보는 것은 의미가 없는 행위라고 강조한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로르샤흐#데이미언 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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