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의 베네치아 여행/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황승환 옮김/336쪽·1만6000원·문학판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머물며 쓴 편지와 시를 묶었다. 릴케는 1897년부터 1920년까지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몇 달 동안 베네치아를 방문했다. 그의 글을 엮은 비르기트 하우스테트는 릴케의 글을 나열하는 수준을 넘어 당시 베네치아의 사회상과 문화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풍부하게 곁들였다.
유명한 장소를 찾아가 사진으로 증명을 남기는 판박이 여행에 질린 사람이라면 재밌게 읽을 만하다. 릴케는 당시 유행했던 여행안내서 ‘베데커’를 비판했다. 꼭 보아야 할 중요한 관광지를 표기한 베데커의 형식이 독단적이라는 이유였다. 또 관광객으로 붐볐던 산마르코 광장에 대해서는 “외지인들이 바보 같은 과장된 백열등 조명을 받으면서 모두 잘난 척 으스대는 것처럼 보인다”고 투덜대기도 했다. 남들이 모두 가는 여행지는 피하고 골목 구석구석 돌아다니길 좋아했던 릴케는 모든 사람이 외면한 유대인 거주지 ‘게토’를 소재로 단편을 썼다.
챕터마다 베네치아 지도를 삽입했다. 책을 보면서 릴케가 본 베네치아의 모습과 지금을 비교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 릴케가 편지에서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다’고 언급한 대목에서 그가 찾아갔을 도서관이 어느 곳인지 짚어주는 식이다. 산마르코 성당을 보고 지은 릴케의 시를 인용해 교회 건축물의 양식을 설명한 대목도 흥미롭다. 독일의 이탈리아 관광센터는 2006년 이 책을 최고의 이탈리아 여행 안내서로 선정했다. 책 표지에는 릴케가 지었다고 적혀 있지만, 사실상 엮은이로 표기된 하우스테트가 릴케의 서신을 해석해서 지은 책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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