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역사속 한식]귀한 얼음, 西氷庫 방화 사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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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때 지어진 경주 석빙고. 동아일보DB
조선 후기 때 지어진 경주 석빙고. 동아일보DB
황광해 음식평론가
황광해 음식평론가
인조 2년(1624년) 12월 22일, 한양 도성의 외곽, 한강변 백성들이 서빙고를 불태웠다. 방화다. ‘인조실록’에는 ‘광해군 시절 서빙고에서 일하던 주민들이 이를 기회로 곡식을 훔쳐 먹었다. 인조 즉위 후, 곡식 훔치는 일을 막자 이를 원망하여 서빙고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인조반정 2년 후이니 광해군 지지파가 남아 있던 시절이다. 정치적 연관성이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불만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서빙고에서 일하면서 곡식을 구하고 끼니를 이었던 이들이 어떤 ‘조처’로 불만을 가졌고 불을 질렀다.

조선시대에는, 겨울철 한강에 얼음이 얼면 그 얼음을 떠서 얼음 창고인 ‘빙고(氷庫)’에 보관했다. 얼음 창고는 ‘장빙고(藏氷庫)’다. 얼음을 떠서 옮기는 이들은 ‘빙부(氷夫)’다. 한강변 인근의 서민들이 부역으로 얼음을 깨고, 창고에 넣는 일을 했다. 부족한 인력은 노비, 군인으로 보충했다. 지방에서는 승려들까지 얼음 부역에 동원됐다. 힘든 얼음 부역을 피하려 하는 이도 많았다.

이현보(1467∼1555년)의 ‘얼음 깨는 노래’(농암집)는 얼음 부역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준다. ‘깎아낸 두꺼운 얼음 설산 같은데/쌓인 추위는 뼛속까지 파고든다/아침이면 얼음 지고 능음(얼음 창고)에 들어가고 밤이면 망치 들고 강 복판에 모인다.’

정강이가 드러나는 짧은 옷을 입고 짚신도 없으니 동상이 걸릴 판이다. 실제 동상이 걸린 이야기도 숱하게 나온다.

조정에서도 얼음 관련 부역이 힘든 줄 알고 있었다. 빙부들에게 술과 곡식을 내렸고 경작할 논밭(빙부전)을 주기도 했다. 영조 때는 부역으로 궁중에 바치는 얼음의 양을 반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현금으로 사게 했다. 당시 1년간 필요한 얼음이 4만여 정이고 백성들의 부역을 통하여 구하는 얼음이 3만여 정이었다. ‘정’은 얼음 덩어리를 말하는데 그 두께가 4치(약 12cm) 정도였다(만기요람).

얼음을 캐는 일도 힘들지만 보관도 쉽지 않았다. 얼음 창고를 개보수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영조 45년(1769년) 12월의 기사는 석빙고(石氷庫)에 대한 것이다. 영의정 홍봉한이 “빙고(氷庫)에 들어가는 나무의 허비가 너무 많다. 돌로 빙고를 만들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빙고의 서까래와 짚도 갈아야 했다. 자주 점검하지만 불이 나는 일도 있었다. 감독 소홀로 감독관이 벌을 받는 일도 잦았다.

겨울에 얼음을 창고에 보관했다가 여름에 사용하는 역사는 오래되었다. 안정복(1721∼1791)은 ‘동사강목’에서 신라 지증왕 6년(505년)에 이미 얼음을 저장했다고 적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신라 3대 왕인 유리왕(?∼57) 때 이미 장빙고를 만들었다고 하나 자신은 지증왕 때 얼음을 저장했다는 ‘설’을 믿는다고 했다.

고려시대에는 개성을 비롯하여 평양 등지에 얼음 창고를 만들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지방 관청에서도 별도의 얼음 창고를 운영했다. ‘고려사절요’에는 고려 고종 30년(1243년)에 ‘무신 최이가 사사로이 얼음을 캐내 얼음 창고에 저장하려고 백성들을 괴롭혔다’고 했다. 조선 후기 문신 심상규(1766∼1838)도 ‘만기요람’에서 조선의 장빙고가 고려의 제도를 물려받았음을 정확히 밝힌다. 동빙고는 두모포(서울 옥수동)에 있고 서빙고는 한강변(용산 서빙고동 일대)에 있다고 했다. 동빙고와 서빙고를 합쳐 외빙고(外氷庫)라 불렀다. 궁궐 내에는 내빙고(內氷庫)가 있었다. 궁중에서는 필요한 얼음을 외빙고에서 옮겨 와 내빙고에 보관해 사용했다. 동빙고의 얼음은 궁중의 제사에, 서빙고의 얼음은 왕실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했다. 동빙고는 규모가 작았고 서빙고는 훨씬 컸다. 서빙고의 얼음은 정해진 규정에 따라 신하들이나 각 부서에 나눠 주기도 했다. 얼음을 나눠 주는 일이 ‘반빙(頒氷)’이다.

장빙고는 매년 12월경(음력) 얼음을 채우고 이듬해 춘분 무렵 문을 열었다. 얼음을 채울 때나 장빙고의 문을 열 때 모시는 제사가 사한제(司寒祭)다. 겨울이 따뜻하여 얼음을 구하지 못할 때가 있으니 추위를 기원했다. 얼음에 공을 들인 이유는 ‘세종실록’에 남아 있다. ‘얼음은 음양의 부조화를 고르게 하는 데도 관계가 있다.’ 얼음은 주로 음식의 부패를 막는 데 사용했지만, 한편으로 ‘양의 여름’과 ‘음의 얼음’이 조화를 이룬다고 믿었다.
 
황광해 음식평론가
#인조#빙고#장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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