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의 시의 눈]병점(餠店)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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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점(餠店) ―최정례(1955∼ )

병점엔 조그만 기차역 있다 검은 자갈돌 밟고 철도원 아버지 걸어오신다 철길 가에 맨드라미 맨드라미 있었다 어디서 얼룩 수탉 울었다. 병점엔 떡집 있었다 우리 어머니 날 배고 입덧 심할 때 병점 떡집서 떡 한 점 떼어 먹었다 머리에 인 콩 한 자루 내려놓고 또 한 점 떼어 먹었다 내 살은 병점 떡 한 점이다 병점은 내 살점이다 병점 철길 가에 맨드라미는 나다 내 언니다 내 동생이다 새마을 특급 열차가 지나갈 때 꾀죄죄한 맨드라미 깜짝 놀라 자빠졌다 지금 병점엔 떡집 없다 우리 언니는 죽었고 수원(水原), 오산(烏山), 정남(正南)으로 가는 길은 여기서 헤어져 끝없이 갔다


병점은 추억 속의 고향이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철길을 걸어오고 고단하고 허기진 어머니는 떡집서 떡을 떼어 먹는다. 철길 가의 어린 맨드라미는 자빠지고 길은 끝없이 멀어져 갔다. 시인은 과거행 기차에 앉아 먼지 낀 차창 너머로 누추하지만 아련한 ‘그 시절 그때’를 건너다보는 듯하다. 기억의 어느 대목도 세세히 밝혀 적지 않은 이 흐릿한 풍경이 어째서 읽는 마음을 오래 적셔주는 걸까.

내가 아는 최정례 시인은 판단과 결행이 빠르고 추진력이 강하다. 우유부단과는 인연이 없어 보인다. 시간과 정력을 아끼려는 마음이랄까, 해야 할 일이든 써야 할 글이든 어서 그 절정을 체험하고 싶어 하는 의욕이 그런 면모를 낳는 것 같다. 추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리라.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에게 옛날은 불현듯 떠올랐다가 아쉽게 사라진다. 그것을 말로 붙잡으려면 온 정신을 모아 그 순간을 살아 내야 한다.

이 시의 단문들은 그것을 속기한 결과이다. 시의 문장들을 이으면 속도에 최적화된 기차의 모양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단문들은 추억이라는 상념의 시공을 최단 거리로 주파하는 듯하다. 주행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흐린 풍경 속에 밴 사연들이 서서히 떠오른다. 전쟁의 폐허를 살아낸 일문의 내력일 그 사연은 힘겹게 밥을 버는 일이기도 하고, 떡 한 조각이 살과 피가 되어 다른 몸으로 이어지는 일이기도 하고, 그 생명이 자라다 비명에 가는 일이기도 하다. 갈라지고 멀어져 간 길처럼 생명들이 흩어져 떠도는 일이기도 하고, 어느 날엔 또 이렇게 돌아와 하염없이 젖은 눈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영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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