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어느날 문뜩 ‘흰빛’이… 예술가 12인의 하루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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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터/이신조 지음/318쪽·1만2000원/문학과지성사

저자가 소설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일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의 1999년 12월 어느 날은 이렇다.

깊은 밤, 겐자부로는 자정이면 다시 잠에서 깰 아들을 기다리며 술을 마신다. 선천성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들은 강박적으로 자정 무렵이면 꼭 잠에서 깨어나 대변을 봤다. 그는 어느 날 밤, 볼일을 끝낸 아들이 제 방으로 돌아왔을 때 침대에 눕히고 담요로 포근하게 감싸줬다. 다음 날 클래식을 좋아하는 아들과 신주쿠에 가기로 약속도 했다. 겐자부로가 잠을 자러 가는데, 아들 방 쪽에서 ‘흰빛’이 일렁거렸다.

소설 속 겐자부로의 하루는 장애 아들을 키운 체험을 바탕으로 생의 불행과 고뇌, 인간 실존 문제를 작품에 녹여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흰빛’은 겐자부로의 소설적 영감일 거다.

저자는 겐자부로뿐만 아니라 시인 김수영, 가수 마이클 잭슨, 배우 틸다 스윈턴, 화가 에드워드 호퍼 등 실존 예술가 12명의 특별한 하루를 엮어 연작 장편소설로 썼다. 성기완 시인은 “‘순간의 전기’라는 새로운 전기적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고 평했다.

‘흰빛’이라는 모티프가 소설의 인물들 전체를 관통한다. 참혹한 6·25전쟁을 겪은 김수영 시인이 ‘모든 통증과 설움과 분노를 바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날, 아버지의 꼭두각시처럼 춤 연습을 하던 마이클 잭슨에게 ‘너만의 음악’을 하라는 목소리가 들리던 그 순간 ‘흰빛’이 다가온다. 그 빛은 삶의 무게 속에서 건져 올린 영감이고 예술적 혼이리라.

의심병 탓에, 예술가의 하루가 실화에 근거했는지 인터넷을 검색해 봤다. 곧 어리석은 짓임을 깨닫고 관뒀다. 믿지 않는 자에겐 ‘흰빛’이 보이지 않을 테니.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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