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살인마 집주인-월세女 ‘치명적 사랑’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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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아멜리 노통브 지음·이상해 옮김/196쪽·1만1800원·열린책들
아멜리 노통브의 21세기 잔혹동화

프랑스어판 ‘푸른 수염’ 책 표지에 실린 아멜리 노통브 사진. 노통브는 외모에 자신이 없지만 사진 찍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기 외모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람으로서는, 칭찬을 퍼붓는 사진작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멋진 결과물을 확인하는 게 꽤나 보람 있다.” ⓒPablo Zamora S Moda ⓒEditions Conelpa
프랑스어판 ‘푸른 수염’ 책 표지에 실린 아멜리 노통브 사진. 노통브는 외모에 자신이 없지만 사진 찍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기 외모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람으로서는, 칭찬을 퍼붓는 사진작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멋진 결과물을 확인하는 게 꽤나 보람 있다.” ⓒPablo Zamora S Moda ⓒEditions Conelpa
어린이에게 샤를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1697년)은 배신의 아이콘이다. 동화책인 줄 알고 읽었더니 오줌을 바지에 찔끔할 정도로 잔혹한 살인극이 펼쳐진다.

푸른 수염을 가진 부유한 남자는 결혼한 뒤 아내를 살해하는 일을 여러 차례 반복해 왔다. 푸른 수염은 새로 결혼한 아내에게 복도 끝 구석진 방에는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여자는 남편의 비밀이 궁금해 방문을 연다. 방 벽에는 푸른 수염이 죽인 아내의 시체들이 매달려 있다. 마지막 장을 덮은 어린이들은 푸른색이 ‘푸른 하늘’처럼 평화로운 색깔이 아니라 창백하게 파란, 공포스러운 색깔임을 배운다.

벨기에 출신 프랑스 소설가 아멜리 노통브는 푸른 수염을 현대판으로 재해석했다. 매년 한 권씩 책을 내는 그가 데뷔 20주년(2012년)을 맞아 20번째 이야기로 푸른 수염을 골랐다. 저자는 출간 당시 “나는 한순간도 빠짐없이, 늘 ‘푸른 수염’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의미 있는 동화이며, ‘푸른 수염’은 내가 깊이 이해하고 있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는 살인자이기 전에, 비밀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인간이다”라고 했다. 기발한 발상, 지적이면서 경쾌한 문체로 폭넓은 마니아층을 확보한 저자는 이번 소설에서도 팬들을 배신하지 않는다.

현대판 푸른 수염의 배경은 프랑스 파리다. 벨기에 출신 여성 사튀르닌 퓌이상(25)은 루브르 미술학교 보조교사로 일하다가 신문에서 월세 광고를 본다. 파리 한복판에 있는 호화 저택 방의 월세가 단돈 500유로(약 66만 원). 친구 집에 얹혀사는 가난한 청춘에게 이 같은 유혹을 뿌리치긴 어려웠다. 사튀르닌은 집주인인 에스파냐 귀족 ‘돈 엘레미리오 니발 이 밀카르’의 아내 8명이 사라졌다는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사한다.

소설은 고급 와인, 샴페인, 화려한 요리를 곁들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가 중심이다. 남녀가 마치 무예로 일합을 겨루듯 ‘밀당’하는 대화들이 책 속으로 푹 빠지게 만든다. “도대체 무슨 변태 놀이를 하시는 거예요. 당신은 방이 필요한 여자들을 집에 들이고, 유혹하고, 잘못을 저지르게 부추기고, 그리고 처벌해요.”(사튀르닌·47쪽) “잘못 알고 있군. 이 성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자들이 도처에 널려 있소. 경제위기가 귀족의 위신을 더욱 고양시켜 놨지.”(돈 엘레미리오·48쪽)

원래 동화가 푸른색과 핏빛으로 단조로웠다면 현대판은 화려하고 다채롭고 예술적이다. 돈 엘레미리오의 비밀을 푸는 열쇠도 색깔이다. 연쇄살인마와의 사랑 같은 로맨틱 블랙코미디로 빠르게 읽히다가 마지막 문장에선 여운을 남긴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푸른 수염#아멜리 노통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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