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조선 名門家의 근원적 힘은 ‘정신적 가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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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그 깊은 역사/권오영 외 지음·416쪽·3만 원·글항아리

명문(名門). 무엇이 떠오르는가. ‘FC바르셀로나’(축구)나 ‘뉴욕 양키스’(야구)가 생각날 수 있다. 구치 프라다 같은 유명 브랜드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명문가(名門家)’를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고 꼼수를 부린 정치인, 골목상권까지 무차별 침투한 재벌 소식을 접하는 우리에게 ‘명문가’는 낯설 뿐이다.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도 계승할 만한 ‘명문가’의 정신이 살아있다’고 항변하는 듯하다. 원로 사학자인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77)과 그의 제자들로 구성된 ‘뿌리회’는 2004년부터 매년 네 차례씩 전국의 조선 명문가를 답사해 이 가문들이 이어온 역사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연구했다.

2011년 ‘조선을 이끈 명문가 지도’가 그 첫 번째 결과물이었다. 영일 정씨 포은 가문, 진성 이씨 퇴계 가문, 광산 김씨 사계 가문, 안동 권씨 탄옹 가문 등 10개 가문을 소개했다. 두 번째로 나온 이 책에는 또 다른 10개 명문가의 역사가 담겼다. 한양 조씨 정암 가문, 창녕 성씨 청송 가문, 창녕 조씨 남명 가문, 영일 정씨 송강 가문, 풍산 류씨 경암·서애 가문, 무안 박씨 무의공 가문, 해주 오씨 추탄 가문, 파평 윤씨 명재 가문, 한양 조씨 주실 가문, 여주 이씨 퇴로 가문이다

가문의 역사뿐 아니라 계보도 그림, 문헌자료, 인물 사진을 곁들여 ‘보는’ 재미를 가미했다. 해주 오씨가 소장한 가장 오래된 가문 계보도인 ‘해주오씨족도’(1401년)부터 풍산 류씨 가문을 대표하는 류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 때 착용했던 투구와 갑옷 자료, 남명 조식(1501∼1572·창녕 조씨)의 영정그림이 인상적이다. 또 영일 정씨 가문이 소장한 송강 정철(1536∼1593)의 가사에 등장하는 역사 속 현장을 상세히 소개하는 사진과 설명은 책의 생생함을 더한다.

명문가의 조건은 무엇일까? 개인적 노력과 성취는 기본이다. 10곳의 가문은 대를 이어 장원급제자를 배출했다. 개개인의 능력만으로 명문가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당대 유명 가문과 통혼권(通婚圈·집안끼리 혼인하는 권역)의 확대를 통해 세력을 공고히 했다. 거칠게 말해 줄을 잘 서는 것도 중요했다. 한양 조씨가 대표적이다. 한양 조씨들은 고려시대 함경도를 기반으로 활동하다 이성계를 만나면서 한양으로 이동한다. 위화도 회군을 종용해 개국공신이 됐고 이씨 가문과 혼맥을 다진 훈구세력이었다. 하지만 사림세력이 성장하자 그들과 교유하며 조광조(1482∼1519)를 사림의 영수 반열에 올렸다.

위기극복 능력도 필수. 영일 정씨 가문의 경우 1545년 을사사화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다. 송강의 부친과 형제는 유배되거나 은둔생활을 하게 됐다. 송강은 전라도 담양으로 거처를 옮긴 후 재기를 꿈꾼다. 한양에 올라가 이이(1536∼1584)와 교유하고 송순(1493∼1582)에게 가사문학을 배우며 내공을 다진 끝에 27세에 장원급제하며 권토중래한다.

책을 덮는 순간 명문가를 가능케 한 근원적 힘은 이 가문들이 투철하게 지켜내고자 했던 ‘정신적 가치’에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조선 명문가들은 벼슬보다는 오히려 예와 덕이라는 정신적 가치를 대대로 유지시키려 했다. 이 책에서는 수많은 관료를 배출한 창녕 성씨 중 어떤 관직도 맡지 않았던 성수침(1493∼1564)을 주목한다. 그는 공부에 매진하고 어려운 사람들 돕는 삶을 살았다. 후대에 이를 인정받아 사후인 1685년(숙종 11년) 영의정에 추증됐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가장 고귀한 것은 힘써 배워 그 지식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명문가#그 깊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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