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맥베스’의 주연을 맡은 김소희(오른쪽)와 박해수. 두 사람은 티켓이 많이 판매됐다는 소식에 “우리가 잘해야 템페스트 등 줄줄이 이어진 셰익스피어 공연이 잘될 수 있다”며 각오를 다졌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2005년 단국대의 연극 수업 시간. 강사는 주목받는 여배우였다. 25명 정원이었지만 60여 명이 몰려들었다. 이들 중 그를 동경하던 한 남학생이 있었다. 체호프의 ‘갈매기’로 수업할 때 배우가 내뱉은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대사에 남학생은 소름이 돋았다.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여배우와 남학생은 연극 ‘맥베스’의 주연으로 만났다. 김소희(44)와 박해수(33)의 이야기다.
김소희는 집중력 높은 연기로 지난해 동아연극상을 포함해 각종 상을 휩쓸며 ‘보석 같은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박해수는 강렬한 마스크에 선이 굵은 연기로 연극, 뮤지컬은 물론 드라마, 영화까지 종횡무진하고 있다.
‘맥베스’(이병훈 연출)는 올해 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을 맞아 무대에 오르는 여러 작품 가운데 첫 작품. 3월 8일부터 23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 2만∼5만 원. 1688-5966. 7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에서 두 배우를 만나 맥베스와 연기 인생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김소희(이하 김)=맥베스 역을 맡은 배우가 박해수라고 했더니 주변에서 “진짜 좋겠다”고 하면서 난리가 났어.
▽박해수(이하 박)=아, 쑥스럽네요. 저는 “맥베스 부인은 김소희”라는 말을 듣자마자 너무 떨려서 다리가 풀렸거든요, 하하.
▽김=네가 나를 불편해하면 어쩌나 했는데 연습 첫날 보니 괜히 걱정했다 싶더라, 후후.
▽박=저는 선배가 대본에 나오지 않은 상황을 상상하는 걸 보고 놀랐어요.
▽김=대본에 나온 상황 앞뒤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상하면 그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거든. 요즘은 세상이 더 연극적인 것 같아. 인천모자살인사건만 봐도 그래. 맥베스가 죽인 덩컨왕은 친척인데, 현실에서는 자기 엄마와 형을 죽이잖아.
▽박=맥베스가 아내가 죽은 후 “언젠가는 죽을 목숨이었다”고 하거나 “뼈에서 살이 발라질 때까지 싸우리라” 하는 걸 보면 불쌍해요. 비극의 끝에서 몸부림치는 광대 같아요.
▽김=난 맥베스 부인이 “손을 이리 줘요”라고 하는 대사에 가슴이 저려. 손을 내밀지만 아무도 안 잡아주잖아. 무섭도록 고독해.
▽박=이번 작품에서 맥베스 부부의 관계를 보면 굉장히 섹시해요.
▽김=맞아. 결핍에서 비롯된 욕망을 강조하기 위해 섹슈얼리티를 부각시킨 것 같아. 이들에게는 아이가 없잖아. 외국 공연을 보면 음식이 엄청나게 차려져 있는 데서 맥베스가 뒹굴기도 하거든.
▽박=그런데 선배는 연기하다 힘들 때는 없었어요? 저는 스물아홉 무렵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해 우울했거든요.
▽김=나는 후배들을 가르치다 슬럼프에 빠졌어. 내가 우리극연구소 1기인데 곧바로 3기를 가르쳐야 했거든. 가르친 그대로 무대에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점점 긴장하면서 스스로를 옭아매게 된 거야.
▽박=아, 그랬군요.
▽김=연극을 그만두려고 했어. 빈 극장에서 “숭인아”(연극 ‘느낌, 극락 같은’의 대사)하고 부르면 메아리치듯 울리는 소리에 위안 받았지. 그러다 신인연기상을 받고 힘이 났어(1998년 서울국제연극제에서 이 작품으로 수상). 이상적인 걸 가르쳐도 나는 그렇게 못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니까 연기가 다시 재미있어졌어.(웃음)
▽박=저는 많은 사람이 아니라 ‘선수’들에게 인정받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선수들끼리는 눈빛만 봐도 딱 아는 그런 거요.
▽김=그런 게 있지. 나는 알고 싶어서 연극을 했어. 예전에 “죽긴 왜 죽어. 세상에 모르는 게 이렇게 많은데”라는 대사를 듣고 울었다니까. 누구도 가보지 못한 정신세계를 경험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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