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tlemen]남성 클래식문화 마니아들, 싱글몰트바-시가바로 슬금슬금

  • 동아일보

느림의 여유가 흐르는 공간들 속속 문열어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싱글몰트 위스키 전문바 ‘볼트+82’는 수십여 가지 몰트 위스키를 판매한다. 위스키와 궁합이 잘 맞는 시가를 선택해 피울 수도 있다. 볼트+82 제공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있는 싱글몰트 위스키 전문바 ‘볼트+82’는 수십여 가지 몰트 위스키를 판매한다. 위스키와 궁합이 잘 맞는 시가를 선택해 피울 수도 있다. 볼트+82 제공
이 시대 아버지들은 지쳤다. 회사와 일에 묻혀 바쁜 일상에 치여 산다. 이따금 유흥업소에 간 아버지들은 소주나 양주에 맥주를 섞어 ‘폭탄주’를 만들어 먹고, 노래방 반주에 맞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스트레스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이런 현대의 각박한 삶에 지친 남성들이 요즘 찾는 것이 클래식 문화다. 조용한 장소에서 맛과 멋을 누리며 자신을 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14일 저녁 빗줄기를 뚫고 찾아간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싱글몰트 위스키 전문바인 ‘볼트+82’. 꿉꿉한 느낌을 털어내고 바 안에 들어서자 오래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쪽엔 벽을 스크린 삼아 흑백 영화 ‘로마의 휴일’이 상영되고 있었고,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에 멜빵바지를 입은 직원들의 서빙에는 여유가 느껴졌다. 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분주한 밖과는 다른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묘한 향기도 퍼져 있었다. 손님이 피우고 있는 시가 향이었다. 이곳은 시가와 위스키를 함께 즐기도록 만든 이른바 ‘시가 바’다.

이곳 직원 ‘테리’는 “시가나 파이프를 피울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이곳을 찾는 손님이 많다”며 “시가 향을 맡고서 ‘여기 방향제 냄새가 좋다’고 하는 손님이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 같은 싱글몰트 바, 시가 바가 속속 문을 열고 있다. 폭탄주로 대변되는 ‘빨리 마시고 빨리 취하자’는 문화에서 비켜가는 것이다. 싱글몰트 위스키가 처음 들어온 2000년 초반에는 호텔에 가야 그 향과 맛을 즐길 수 있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더 셜록’에 진열된 연초 제품들. 더 셜록 제공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더 셜록’에 진열된 연초 제품들. 더 셜록 제공

하지만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최근 몇 개월 사이 서울에서만 청담동 한남동 이태원동 홍익대 근처에 10곳 정도의 싱글몰트 바가 생겨났다. 주요 고객은 30∼50대 남성. 주로 잔 단위로 술을 파는 바에서 한 모금씩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거나 혼자만의 사색의 시간을 갖는다.

국내에는 아직 생소한 시가와 파이프 문화도 멋과 여유를 찾은 중년 남성을 유혹하며 조금씩 확산되는 양상이다.

필터 담배와 달리 피우는 방법이 복잡하고 관리하는 데 손이 많이 가지만 여유롭게 다양한 담배 맛을 음미할 수 있는 게 매력이다. 동호회를 통해 차츰 확산되는 문화 덕에 시가와 파이프를 사서 즐길 수 있는 곳도 늘고 있다.

최근 한남동에 문을 연 ‘더 셜록’은 시가와 파이프를 함께 파는 매장이다. 더 셜록의 박진구 사장(39)은 “요즘 시가, 파이프 관련 커뮤니티 회원수가 급증하고 있으며 최근 개최한 파이프 관련 행사에 1000명 넘는 사람이 몰리는 등 기대 이상의 호응이 나타났다”며 “1∼2년 안에 시가·파이프 시장 규모가 2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사장은 이달 말 강남구 청담동에 국내 최초로 ‘시가·파이프 바’라는 콘셉트의 매장도 열 예정이다. 이곳은 싱글몰트 위스키, 코냑 등과 시가, 파이프, 연초 등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진다.

중년 남성들의 발길을 끄는 또 다른 클래식 문화는 LP(레코드판)다. 손가락만 까딱하면 깨끗한 음질의 음악을 바로 들을 수 있는 요즘, LP는 속도나 음질에 있어 객관적 경쟁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직’거리는 소리까지 즐기며 다시 LP를 찾는다.

LP를 틀어주는 카페는 보통 ‘남초’ 공간이 된다. 고객 중 70% 이상이 남성인 서울 홍익대 근처의 ‘곱창전골’도 그런 곳이다.

이곳을 자주 찾는 직장인 김정희 씨(남·38)는 “LP를 들으면 바쁜 일상을 잠시 잊을 수 있다”며 “남성을 위한 휴식처가 많지 않은데 LP바가 그런 흔치 않은 곳”이라고 말했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와 달콤한 디저트를 제공하는 카페가 많지만, 그런 곳은 여성을 위한 곳이지 남성 친화적인 장소는 아니란 얘기였다.

유행을 타지 않는 클래식 패션과 혼자 떠나는 ‘싱글 캠핑’도 대부분 남성의 몫. 이런 현상도 ‘빨리빨리’ 문화에 대한 반감이란 분석이다. 클래식 문화에서 여유를 찾는 남성의 모습을 보며 ‘느림의 미학’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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