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10개의 에피소드에 비친 일본사회 풍경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8일 03시 00분


◇소문의 여자/오쿠다 히데오 지음·양윤옥 옮김/404쪽·1만2800원·오후세시

‘공중그네’ ‘오 해피 데이’ ‘남쪽으로 튀어’의 저자인 오쿠다 히데오가 지난해 발표한 작품. 책 표지에 있는 ‘오쿠다 히데오 최초의 통쾌한 범죄 스릴러’란 광고문구가 먼저 눈에 띈다. 오쿠다가 범죄 스릴러에서 앞서 달리던 히가시노 게이코나 미야베 미유키에게 뒤늦게 도전장을 낸 걸까. 일본 소설 팬이라면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범죄 스릴러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용의자의 주도면밀한 범행도 이를 쫓는 형사의 치밀함도 찾아보기 힘들다. 에피소드 10개를 이어 만든 이 장편소설은 매혹적인 여성인 이토이 미유키라는 ‘실’로 꿰어지는데, 미유키의 정체가 점차 베일을 벗는 형식을 띤다. 그렇지만 미유키가 의문의 사망 사건들과 연결돼 있다는 정황만 있고, 매끈한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범죄물로 보기엔 뭔가 찜찜하다.

그 대신 제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소문’이다. 미유키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 대개는 그것도 출처가 불확실한 얘기들만 건네 듣고 입방아 찧는 사람들의 모습을 폭넓고 생생하게 그린다. ‘공중그네’의 정신과 의사 이라부처럼 미유키는 사건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에 그치며, 정작 독자가 재미를 찾아야 할 곳은 무려 50여 명에 달하는 조연들이다.

미유키는 평범한 얼굴에 수줍은 시골 소녀였다. 상고에 진학한 뒤 전문대에 다닐 무렵 그는 변한다. 화장이 짙어지고 숨겨져 있던 자신의 성적 매력을 발견한다. 중고차 매매 회사의 사무직으로 들어간 그는 사장을 꾀고, 나중에는 마작도박장 직원, 호스티스 바 사장으로 변신하며 남자들을 차례로 유혹해 돈과 권력에 다가선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소설의 구성이다. 미유키에게 끈적이는 시선을 보내는 남성들, 그에게 질투하는 여성들의 입을 빌려 미유키의 실체를 점차 드러내기 때문. 관음증적 매력이 가득해 좀처럼 책장을 덮기 어렵다.

오쿠다 히데오.
오쿠다 히데오.
작가는 미유키를 둘러싼 사람들을 통해 일본사회의 풍경을 날카롭게 그린다. 오랜 저성장기에 지친 일본인에게 짙게 깔린 허무, 불안, 자포자기의 모습들이다. 지방 대학을 졸업하고 구두 도매점에 취직했지만 불황에 해고된 스물두 살의 여성은 실업수당을 받으며 빠찡꼬 업소를 전전하고, 의류품 도매점의 영업사원들은 퇴근 후 마작도박장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점당 100엔(약 1100원)짜리 마작에 열을 올린다. 보육원 교사인 히로미는 아버지가 비정규직으로 전환되자 집 대출금 부담에 결국 호스티스로 나선다. 논픽션보다 사실적으로 일본 서민들의 삶을 생생히 포착했다.

미유키는 남자들을 유혹하며 승승장구하지만 결국 의문의 사망 사건들이 일어나며 용의자로 몰린다. 이런 미유키를 보는 시각 또한 흥미롭다. 미유키의 대학 동창은 이렇게 말한다. “평범하게 결혼해서 아이 둘 낳고, 부동산업자의 작은 주택을 사고, 집안일과 육아와 대출금에 쪼들리고… 지방에서 여자들은 모두 그런 인생의 배를 타는 수밖에 없잖아. 하지만 미유키는 연약한 팔 하나로 자신만의 배를 저어 큰 바다로 나갔어. 돈 많은 애인 한두 명쯤 죽인 거, 난 여자로서 정당방위라고 생각해.”

소설을 읽다 보면 미유키가 악녀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된다. 모두들 돈, 권력, 미녀(미남)를 좇는 사회이고, 대다수는 경쟁에서 밀려나 절망하는 게 현실. 사람들은 겉으론 미유키를 욕하지만, 돌아서선 그의 비도덕적인 성공을 한 번쯤 부러워하지 않을까. 여러 물음표를 남기는 결말에 묘한 여운이 감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소문의 여자#오쿠다 히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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