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하늘 커튼이 그렇게 많은 말을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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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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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파리대왕’ ★★★☆

생존본능만큼 강한 인간의 권력 욕망을 그린 연극 ‘파리대왕’에서 붉은 빛 조명을 투사한커튼으로 불꽃과 공포를 동시에 형상화한 장면. 극단 하땅세 제공
생존본능만큼 강한 인간의 권력 욕망을 그린 연극 ‘파리대왕’에서 붉은 빛 조명을 투사한커튼으로 불꽃과 공포를 동시에 형상화한 장면. 극단 하땅세 제공
영국 소설가 윌리엄 골딩의 노벨문학상 수상작 ‘파리대왕’은 쥘 베른의 해양모험 소설 ‘15소년 표류기’의 구도를 가져와 사춘기 소년의 내면에 가장 순수한 형태로 간직된 인간성의 심연을 파헤쳤다. 절해고도 무인도에 불시착한 소년들의 리더로 선출되는 랄프가 합리적 이성을 대표한다면 나중에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잭은 폭력적 권력욕을 상징한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자가 아폴론의 화신이라면 후자는 디오니소스의 화신이다.

무대미술가 출신 윤시중 씨가 이끄는 극단 하땅세는 이를 보다 강렬한 이분법 구도로 단순화시키면서 바다와 해변, 절벽과 숲을 넘나들어야 하는 이 작품의 공간을 참신한 무대언어로 구축했다. 그 주된 소재는 하늘하늘한 커튼이다.

무대 중앙을 둘러싸고 360도 회전하는 커튼걸이를 따라 변화무쌍하게 이동하는 커튼은 때로는 해변을 넘실거리는 수평적 파도로, 때로는 활활 불타오르는 수직적 불길로 변신한다. 또 투명한 흰색 커튼 너머에서 소년들의 상상 속에 꿈틀거리는 괴물을 형상화하는가 하면, 불투명한 검은 커튼을 통해 인간의 이성을 압도하는 불가해한 본능을 암시하기도 한다.

20명 넘는 원작 속 소년들을 10여 명으로 압축하면서 여배우와 남배우를 비슷하게 기용해 소년들에게 잠재된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담아낸 점도 절묘한 선택이었다. 다만 원작 속 다층적 인물군상을 선(랄프)과 악(잭)의 단순한 이분법으로만 응축한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커튼 앞에서 그림자놀이와 함께 펼쳐져 귀여운 미니어처 아동극처럼 느껴지는 점은 관객의 확대라는 점에선 장점이겠지만 원작의 깊이를 제대로 못 담는 점에선 단점이기도 하다.

: : i : :

윤조병 번역. 윤시중 연출. 문숙경 임세환 권제인 박영희 임세운 최병준 출연. 31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2만5000원. 02-6406-8324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파리대왕#윌리엄 골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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