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Life]오디오맹(盲)의 헤드폰 입문기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8월 18일 03시 00분


대원칙은 ‘백문이 불여일청’ 좋아하는 음악 들으며 비교하라

스마트폰이나 MP3플레이어에 끼워주는 번들 이어폰을 벗어나, 처음으로 내 돈 주고 헤드폰을 장만해 보려는 당신. 그러나 막상 인터넷이나 매장을 찾아보면 어려운 단어가 난무해 어지럽기만 하다. 이런 독자를 대신해 가상의 인물인 직장인 김막귀 씨가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한 헤드폰 전문 매장을 찾았다. (‘막귀’는 소리의 질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을 뜻하는 인터넷 용어)

○ 왜 그때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지난 월요일 오전 8시. 김 씨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영국 록 밴드 ‘라디오헤드’의 ‘15 Step’을 듣다가 헤드폰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난달 말 이후 김 씨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미묘한 불편함과 불만을 느껴 왔다. ‘이게 아닌데….’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음악 소리는 자꾸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가 이런 느낌을 가지게 된 계기는 지난달 말 열린 한 록 페스티벌이었다. 당시 그는 라디오헤드의 실황 공연, 특히 보컬 톰 요크를 보며 열광해 그야말로 방방 뛸 수밖에 없었다. 전설적인 밴드의 첫 내한공연. 기타 줄 튕기는 소리, 마이크 너머로 들리는 숨소리, 육중한 스피커를 통해 전해지는 드럼의 비트는 피부를 뚫고 뼛속까지 울리는 듯했다. 음악이, 아니 공연장의 모든 소리가 신비한 에너지처럼 온몸을 파고들었다.

그날의 그 소리를 다시 한 번 듣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김 씨는 아쉬운 대로 스마트폰과 이어폰으로 만족하려 했지만 채 한 달도 버티지 못했다. 회사 책상에 앉은 월요일 오전 9시, 김 씨의 ‘오디오질(오디오 관련 제품에 대한 투자)’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삶의 순간에 BGM을 깔다

‘헤드폰이 다 거기서 거기지.’ 매장 문을 열 때만 해도 김 씨는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에 진열된 수백 가지의 헤드폰과 이어폰의 모습을 보자마자 기가 질려버렸다. 모양이나 크기는 둘째치고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2만∼3만 원대의 제품이 있는가 하면 500만 원이나 하는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막막했다. 마침 매장 매니저가 그곳을 지나고 있었다.

“헤드폰을 하나 사려고 하는데요.” “어떤 종류를 원하시죠?” “…….”

아는 것이 없으니 설명할 길도 없다. 김 씨는 대신 그곳까지 오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형적인 오디오 입문자이시네요. 많은 사람이 고객님처럼 감동적인 공연이나 음반을 듣고 오디오 공부를 시작하죠. 제가 잘 아는 오디오평론가 오승영 씨도 1985년 첼리스트 모리스 장드롱의 내한공연 때 들었던 모차르트의 곡 때문에 오디오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했대요. ‘그때 느꼈던 감동을 집에서도 느껴보고 싶었다’고 하시더군요.”

매니저가 물었다. “그런데 왜 스피커 말고 헤드폰을 찾으시죠?”

“헤드폰이 더 합리적인 것 같아서요.” 경기 수원시에 사는 김 씨는 출퇴근 시간이 무척 길다. 하루 두 시간 이상을 지하철에서 보낸다. 무료해지기 쉬운 출퇴근 시간에 음악을 듣는 것이 그의 삶에선 커다란 활력소. 게다가 스피커는 위치와 거리를 잘 갖춰야 제대로 된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반면 헤드폰은 귀에 꽂기만 하면 된다는 점이 간편해 보였다.

“그렇다면 헤드폰이 딱 맞겠네요. 다행히 헤드폰의 품질이 최근 몇 년간 꽤 높아졌답니다. 오디오 전시회에 헤드폰 부스만 따로 생길 정도로 관심도 많아졌고요. 헤드폰은 스피커에 비해 표현력이 다소 부족하지만, 스피커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을 줄 수 있어요. 아까 말씀드린 오승영 씨는 헤드폰의 가장 큰 장점으로 실외에서 즐길 수 있다는 점을 꼽았어요. 제대로 된 음원과 헤드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내 삶에 BGM(배경음악)을 깔 수 있잖아요.

얼마 전 평소 스피커로만 음악을 들었다는 분이 오셔서는 ‘가수 박정현의 노래는 헤드폰으로 들어야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예전엔 그냥 보통 대중가수로만 생각했는데,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니 바이브레이션이 정말 죽이더랍니다. 가수의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잖아요. 그렇게 보름을 듣고 나니 ‘이래서 사람들이 헤드폰에 미치는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던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재즈가수 웅산 씨의 노래도 헤드폰으로 들어보실 것을 권해요. 특히 해질녘에 들으면 영혼을 울리는 것 같거든요.”

○ 스펙보다는 내 귀를 믿어야

“이건 대체 무슨 말이죠? 주파수 대역이니 허용입력이니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만 있네요.” 김 씨가 진열대에 놓인 설명서를 보며 말했다.

“재생 주파수 대역이란 헤드폰이 재생할 수 있는 소리의 높낮이 범위를 말해요. 소리란 공기의 진동이기 때문에 진동수 단위인 헤르츠(Hz)를 사용하죠. 예를 들어 주파수가 10Hz에서 2만 Hz라고 하면 이는 최소 10Hz의 저음과 최대 2만 Hz의 고음을 완벽히 재생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렇지만 이 스펙은 큰 의미가 없어요.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주파수는 보통 16Hz에서 2만 Hz 사이거든요. 이 주파수를 벗어난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저음의 경우 소리가 아닌 진동으로 느낄 수 있지만 고음은 그렇지도 않아요.

임피던스(Impedance)는 회로에서 전류가 흐르기 어려운 정도를 나타내는 말로 단위는 옴(Ω)입니다. 이 수치가 높으면 별도의 증폭장치(앰프)를 연결해 사용해야 할 수도 있어요. 음질은 좋아질지 몰라도 증폭장치가 없이는 소리가 너무 작게 들리죠. 60Ω을 넘는 임피던스 값을 가진 헤드폰은 별도 앰프에 연결해서 사용해야 할 수도 있으니 구매 전에 확인해야 돼요.”

○ 저음? ‘전람회의 그림’ 들어보라

김 씨는 아직 알쏭달쏭했다. “그러면 헤드폰을 고르는 구체적인 기준은 뭔가요?”

“자기가 원하는 소리가 나는지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매니저는 헤드폰을 고를 때는 자신의 음악적 취향과 맞는지 들어보라고 했다. 중저가 헤드폰의 경우 저음이나 고음 중 특정한 부분만 강조되어 들리도록 한 제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저음 재생 성능과 관련해서는 타악기인 팀파니나 피아노의 음색이 또렷하게 들리는지 확인해 보면 된다. 팀파니는 최저 70Hz의 소리를 내기 때문에 이 소리가 왜곡되거나 찌그러지면 저음 재생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피아노의 가장 낮은 두 옥타브도 잘 들려야 한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교향곡’ 2, 3번 1악장이나 오르가니스트 장 기유가 파이프오르간용으로 편곡한 ‘전람회의 그림’이 깔끔하게 들리는 제품을 고르면 된다.

고음이 찌그러지거나 지지직거리며 끓는 듯한 소리가 나는 제품은 피해야 한다. 고음의 왜곡은 헤드폰이 미세하고 빠른 진동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증거다.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의 ‘카르멘 판타지’나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의 아리아가 잘 들리는 제품이 좋다.

“지하철에서 주로 사용하신다고 하셨죠? 주로 어디서 쓸지도 생각해야 돼요.” 매니저는 두 가지 제품을 번갈아 보여줬다. 먼저 보여준 헤드폰의 바깥쪽에는 무수한 구멍이 나 있었다. “개방형 헤드폰은 소리의 입체감이 뛰어납니다. 단, 바깥의 소음을 잘 막아주지는 못해요. 시끄러운 곳에서 쓰기에는 약간 불편하죠.” 이어 보여준 제품은 구멍이 없는 제품이었다. “밀폐형 헤드폰은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를 잘 막아주죠. 그중에서도 ‘노이즈캔슬링(Noise Cancelling)’ 기술을 적용한 헤드폰은 소음을 더 효율적으로 막아줘요. 외부 소음과 반대 파형의 소리를 만들어 상쇄하는 방식이죠.”

“밖에서 쓰는 물건인데 디자인도 중요하지 않나요?” 김 씨가 물었다. 인터넷에서 “헤드폰을 살 때는 ‘요다 현상’을 조심해야 한다”는 글을 봤기 때문이다. 요다 현상은 헤드폰을 썼을 때 귀 윗부분이 부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모습이 영화 스타워즈의 ‘요다’를 닮았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매니저가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그래서 요즘 헤드폰 매장에는 작은 거울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렇지만 너무 디자인만 쫓다가는 저질 제품을 쓰게 될 수도 있어요. ‘소리 나는 머리띠를 했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을지도 모르죠.”

충분한 설명을 들어 나름대로 자신감이 붙은 김 씨가 매니저에게 물었다. “오늘 좋은 헤드폰을 구입하면 저도 황금귀(소리를 구분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가 될 수 있을까요?”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만난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자기에게 맞는 헤드폰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많이 들어보라’고 권하던데요. 백문(百聞)이 불여일청(不如一聽)이지요.”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헤드폰#오디오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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