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Life]더 새롭게, 더 스릴있게… 암벽 위 퍼즐의 설계자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4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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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TOP 4’ 김동현 씨를 통해 본 이색직업 루트세터의 세계

‘더욱 아름답고, 더욱 강렬하게.’ 김동현 씨는 인공암벽 위에 새로운 길을 그리는 루트 세터다. 그는 “루트 세팅은 평생 동안의 등반 경험을 녹여 만드는 것”이라며 “그래서 쉽지 않고 아무나 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더욱 아름답고, 더욱 강렬하게.’ 김동현 씨는 인공암벽 위에 새로운 길을 그리는 루트 세터다. 그는 “루트 세팅은 평생 동안의 등반 경험을 녹여 만드는 것”이라며 “그래서 쉽지 않고 아무나 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악취 감식가’ ‘공룡 뼈 먼지 청소부’ ‘동전 윤내기 담당자’…. 미국의 사진작가 낸시 리카 시프의 책 ‘기이한 직업들’에 등장하는 직업들이다. 책에는 평소 듣도 보도 못했던 직업 65개의 프로필과 사진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다 보면 또 하나의 낯선 직업과 맞닥뜨리게 된다. ‘루트 세터(route setter).’

“선수들이 제가 원하는 곳에서, 제가 원했던 동작을 하게끔 만드는 거예요. 기계로 대체할 수 없는 창조적인 일들 중 하나죠.”

루트 세터 김동현 씨(38)가 말했다. 그는 국제스포츠클라이밍연맹(IFSC)에서 인정한 전 세계 최고 실력자 4명 중 한 명. 그를 포함한 4명만이 다른 루트 세터들을 교육할 수 있다.

○ 벽 위에 그리고 몸으로 푸는 그림

루트 세터는 인공 암벽에 홀드(인공 손잡이)를 비롯한 다양한 구조물을 배치해 클라이머들이 올라가는 코스를 설계한다. 즉, 스포츠 클라이밍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풀 ‘문제’를 출제하는 것이 주된 일이다. 선수들의 몸 상태와 수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코스의 난이도를 결정한다.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의 컨디션과 레벨을 정확히 알아야만 예선전, 준결승전, 결승전에 알맞은 코스를 각각 설계할 수 있어요. 누구나 쉽게 올라가거나, 아예 완등자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 걸 어떻게 아냐고요? 풍부한 경험밖에 없죠.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몸과 머릿속에 ‘게이지’를 갖게 되는 겁니다.”

IFSC 루트 세터의 지위는 크게 3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 단계의 루트 세터들은 자기 나라가 있는 대륙 지역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콘티넨털 루트 세터’). 두 번째 단계가 되면 전 세계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인터내셔널 루트 세터’). 마지막 ‘치프 루트 세터’는 국제 대회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의 루트 세터들을 지휘해 코스 설계를 총괄한다.

단계를 높이기 위해서는 하위 루트 세터로서의 경력을 일정 기간 동안 쌓아야 한다. 인터내셔널 루트 세터가 되기 위해서는 콘티넨털 루트 세터로 2년 정도의 경험을 쌓아야 하는 식이다.

1998년 처음 루트 세터의 길로 들어선 그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콘티넨털 루트 세터 경력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라갔다. 그리고 이제는 치프 루트 세터들 중에서도 단 4명만이 가능한 교육 담당이 됐다. 그는 치프 루트 세터 26명 중 유일한 아시아인이기도 하다.

루트 세터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인공 암벽의 모양을 결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90도의 경사를 지닌 높이 4m, 폭 4m의 암벽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암벽의 경사가 다양해지고, 모양도 입체적으로 변했다. 게다가 홀드 등 다양한 구조물들이 개발되고 보급되면서 루트 세터들의 ‘출제 범위’도 넓어졌다. 구조물의 크기와 모양, 그 개수까지가 모두 루트 세터의 선택에 달려 있다. 김 씨는 “주어진 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문제’가 단순히 머릿속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루트 세터들은 끊임없이 암벽을 오르며 자신이 낸 ‘문제’를 검토한다. 자신이 직접 등반을 해 보며 난이도를 조정하고, 불가능한 동작들은 제외해 나간다. 더욱 창의적이고 멋진 동작들을 고민하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암벽을 오르락내리락한다. 따라서 평소 몸관리도 필수다.

기본적으로 결승전은 43개 동작 안에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구성한다. 국제 대회 결승전에서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8분이지만 실제로는 3분에서 5분 안에 주어진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만든다. 따라서 중간에 쉬어 갈 수 있는 동작이 하나라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

선수들 중에는 대회에 참가하기 전에 담당 루트 세터가 누구인지를 알아내, 그에 맞춰 훈련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루트 세터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코스를 연구해 스타일이나 선호하는 동작 유형 등을 파악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루트 세터들도 매번 새롭고 기발한 ‘길’을 생각해내야 한다.

“하지만 ‘이거 한번 풀어봐. 네가 감히…’라고 생각하면서 선수들과 경쟁하려고 해서는 안 되죠. 선수가 빛나야 루트 세터도 빛날 수 있는 거예요.”

○ 관람객은 보는재미, 선수는 해결하는 재미

루트 세터들이 고민해야 할 것은 또 있다. 바로 관람객들의 호응. ‘저것을 어떻게 올라가지?’라는 궁금증에서 출발해,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코미디 영화를 만들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는 거예요. 그럼 그 영화는 제대로 된 영화가 아니잖아요. 루트 세팅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의도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가슴을 졸이고, 함께 즐거워하게 만들어야죠.”

이를 위해서는 작은 ‘트릭’들이 가미된다. 보통 관람객들은 납작하고 넓은, 지름 50cm의 홀드가 여러 개 붙어 있으면 코스가 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코스는 선수들에게 결코 쉽지 않은 길이다. 그들은 코스를 처음 딱 보는 순간 ‘저건 엄청나게 흐르는구나(홀드의 경사 때문에 미끄러진다는 뜻)’라고 직감한다. 납작하고 넓은 홀드들은 손으로 잡을 곳이 마땅치 않다.

한 손가락만 깊숙이 들어가게 제작된 홀드는 그 반대. 관람객들은 ‘어떻게 손가락 하나로 몸무게를 지탱하지?’란 생각을 하지만 단련된 선수들에게는 어렵지 않다. 이렇듯 루트 세터는 관람객과 선수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이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보는 재미를, 선수들에게는 ‘문제’를 해결하는 재미를 동시에 선사하는 것이다.

경기 중 간혹 고정되어 있던 홀드가 휙 돌아가거나 깨지는 등 ‘기술적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를 예방하는 것도 루트 세터의 몫. 인공 암벽의 경도부터 시작해 바닥에 깔린 매트의 개수, 홀드의 거칠기 등을 꼼꼼히 체크해 가능한 사고들을 미리 방지해야 한다. 루트 세터들은 사고가 한 번 일어날 때마다 자신의 ‘점수’가 깎였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대회가 끝난 뒤 치프 루트 세터가 연맹에 제출하는 보고서에는 사고 횟수를 적어 넣도록 되어 있다.

“저희들의 성적은 바로 동영상 공유 사이트인 유튜브에서 매겨진다고도 볼 수 있어요. 관중이 캠코더로 경기 장면을 찍어서 올리면 그 밑에 ‘저 동작 멋있다’ ‘재미있다’ 등 다양한 댓글들이 달리거든요. 그런 것들을 통해 자신의 루트가 어땠는지 정확히 알 수 있죠.”

○ 18m에서의 추락사고


김 씨는 클라이밍 선수로도 10여 년 동안 활동했다. 1993년 전국 우정스포츠클라이밍 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정상급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1997년 9월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슬로베니아에서 열리는 클라이밍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안양공설운동장 인공암장에서 연습을 하던 중 18m 높이에서 떨어졌다. 척추가 두 군데 골절됐고, 오른쪽 골반 뼈가 으스러졌다. 오른쪽 발도 돌아가는 등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의사가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아도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 걱정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리에 철심을 박은 상태로 화장실에서 간호사 몰래 턱걸이를 했다. 그저 좋아했던 산에 단 한 번만 더 올라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회복 속도는 두 달 만에 퇴원을 할 정도로 무척 빨랐고, 그 다음 해 여름 일본에서 루트 세팅 교육을 받으며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처음 인공암벽을 찾았을 때부터 저는 누가 내준 문제를 푸는 것보다는 문제 내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때는 개척등반에 몰입하기도 했지요.”

17일 오후 실내 인공암장을 찾아온 사람들을 가르치던 그가 말했다. 실내 인공암장은 삼삼오오 모여 서로 이용해야 할 홀드를 정해주며 ‘문제’를 내고, 암벽을 오르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회사 생활에서는 성취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잖아요. 하지만 스포츠 클라이밍에서, 특히 볼더링 같은 종목에서는 매번 문제를 풀 때마다 짜릿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어요.”

이제 막 몸을 풀기 시작하는 최진호 씨(36)가 말했다. ‘볼더링’은 스포츠 클라이밍의 공식 종목 중 하나로, 5m 이내 인공암벽의 정해진 코스를 로프 없이 오르는 것이다. 김 씨가 웃으며 덧붙였다.

“스포츠 클라이밍은 손끝에서 발끝까지를 다 사용하는 전신 운동이에요. 그리고 또 순간순간 판단을 해야 되죠. 머리와 몸을 써서 매 순간 퍼즐을 푸는 재미가 아주 좋아요.”

그는 중국에서 열리는 아시안 챔피언십 대회의 루트 세팅을 위해 21일 오전 출국한다.

:: 루트 세터(route setter) ::

인공암벽에 다양한 구조물을 배치해 등반 경로를 설계하는 사람.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루트 세터#암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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