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서울 종로구 통인동 이상의 집터 앞에서 이상의 생애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함돈균 씨. 이상의 집터에 신축을 검토 중인 2층짜리 ‘이상의 방’ 조감도. 세미나와 모임 장소로 활용되고 있는 ‘이상의 방’ 내부.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 1930년대 전위적이고 파격적인 시들로 한국 문단에 파장을 몰고 온 천재 시인 이상(李箱·1910∼1937·사진). 그가 남긴 작품들은 지금도 활발하게 연구되는, 살아 있는 텍스트다. 하지만 그를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을 찾기란 쉽지 않다. 시인이 태어난 서울 사직동 집터는 확인 불명이다. 그가 다녔던 신명과 동광학교는 사라졌고 보성학교는 조계사가 됐다. 》
일본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수하동의 일본식 저층 아파트도 철거됐으며 연인 금홍과 차렸던 종로의 제비다방도 정확한 위치를 놓고 의견이 갈린다. 미스터리 같은 그의 시어들처럼 시인의 행적 또한 풀기 어려운 암호가 되었다.
그런 이상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가 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10번지다. 큰아버지 집이었던 이곳에서 이상은 세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살았다. 하지만 이상이 살던 집은 허물어졌고, 현재 이곳에는 70m²의 오래된 한옥(1940년대 건축 추정)이 있다. 2009년 7월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이 건물을 매입해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이곳을 관리하고 있다.
아름지기는 지난달 19일부터 이곳을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지난해 한옥을 허물고 ‘이상의 방’이라는 2층짜리 건물을 새로 지으려고 했지만 “더 논의가 필요하다”는 잠정 결론을 내려 공사는 미뤄진 상태다. 이에 따라 우선 있는 그대로 시인의 집터를 공개한 것이다. 이상의 작품 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수류산방)를 펴낸 문학평론가 함돈균 씨(39·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와 이곳을 찾았다.
“몇 년 전 이곳에 왔을 때는 옷 수선집과 한자를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죠. 한참 동안 밖에서 서성대다가 돌아섰던 기억이 나네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문을 열고 작은 콘크리트 마당으로 들어섰다. 왼쪽에 ‘이상의 방’이란 이름의 작은 회의실이 보였다. 큰 탁자 1개와 작은 탁자 2개, 10여 개의 의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곳에선 누구든지 세미나와 모임을 할 수 있고, 커피와 차도 무료로 마실 수 있다. 지난달에는 이상의 시문학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고, 28일에는 이상문학회가 모임을 가졌다. 문인과 학자들이 이상의 집터에서 이상과 소통하는 셈이다.
“이상은 (지나간) 역사적 텍스트가 아닙니다. 요즘 시인들도 여전히 이상의 에너지 속에 절망하고 영향을 받으며 시를 씁니다. 이상의 오감도에 아해(아이)들이 나오는데 이원, 이수명, 김민정, 황병승의 시에 아이들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함 씨는 “이런 극적인 공간을 오랫동안 방치해 왔다는 게 아쉽다. 이제라도 살아 있는 공간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큰 다행이다”라고 했다.
‘이용은 무료입니다. 주저 말고 들어오세요.’ 입구에 붙어 있는 안내문을 보고 쭈뼛대던 행인 서너 명이 들어와 찬찬히 둘러봤다. “내가 색소폰을 부는데 이곳에서 공연을 해도 좋겠느냐”고 안내 직원에게 묻는 중년 남자도 있었다. 알음알음 찾아오는 방문객들로 이상의 집터는 생기를 얻어가고 있었다. 일본 도쿄 거리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한 조선인)’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된 후 폐결핵이 악화돼 외롭게 간 ‘박제가 된 천재’는 이젠 외롭지 않을 듯했다.
‘이곳에서 내 스무 살 때 근대문화의 연인을 보고 갑니다.’ ‘하루에 몇 번씩 지나쳐가다 처음 발걸음을 했습니다. 예술가의 감성을 담아 돌아갑니다.’ ‘먼발치에서 머리로만 알고 있던 이상을 어딘지 모르게 직접 만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발은 따뜻해졌는데 마음이 살짝 외로워지네요.’ 이상을 만난 사람들이 남기고 간 방명록에 오래 눈길이 갔다. 따스했고, 촉촉했다. 운영시간 오전 10시∼오후 8시. 월요일 휴무. 02-741-8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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