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지교를 꿈꾸며]연극 ‘풍찬노숙’ 작가 김지훈 - 주인공 윤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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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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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를 꿈꾸는 작가… 작가의 혁명을 품은 배우

김지훈 작가(오른쪽)와 윤정섭 배우. 김 씨는 “이 친구(윤정섭)가 발성이 좋지만 음치라서 뮤지컬 배우는 못할 것”이라며 웃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김지훈 작가(오른쪽)와 윤정섭 배우. 김 씨는 “이 친구(윤정섭)가 발성이 좋지만 음치라서 뮤지컬 배우는 못할 것”이라며 웃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연극 ‘풍찬노숙’에서 큰북을 찢을 듯 호방하게 북채를 휘두르던 순대빛깔민족(다문화가정 출신)의 영웅 ‘응보’는 무대 밖에선 초면의 상대 앞에서 잔뜩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소심남’이었다.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배우 윤정섭 씨(29)다. 풍찬노숙의 마지막 공연을 이틀 앞둔 10일 공연장인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이 작품의 작가 김지훈 씨(33)와 주인공인 윤 씨를 함께 만났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 씨는 2008년 김 씨가 쓰고 연희단거리패의 수장 이윤택 씨가 연출한 4시간 반짜리 초대작 연극 ‘원전유서’ 초연 때 대사 몇 줄 없는 단역으로 연극 무대에 데뷔했다. 이 연극이 동아연극상 5관왕 등 그해 연극상을 휩쓸고 이듬해 재공연 때 윤 씨가 주연 ‘남전’ 역을 맡게 됐다. 김 씨의 강력한 요청 때문이었다. 야구로 치면 2군 연습생에게 한국시리즈 선발 투수를 맡긴 격이다. 당시 수습 딱지도 떼지 못했던 초보 배우 윤 씨에게서 김 씨는 무엇을 본 것일까.

“이 친구가 초연 때는 출연 배우 서른 명 중 한 명, 보이지 않는 존재였지만 제 눈에 확 띄었어요. 대극장을 장악할 수 있는 발성과 눈빛이 있었어요. 이건 굉장히 귀한 겁니다.”

윤 씨는 원전유서를 마치고 곧바로 연희단거리패의 ‘5대 햄릿’으로 발탁됐으니 김 씨의 눈이 틀리지 않았던 셈이다. 이후 그의 작품엔 으레 윤 씨가 나왔다. 원전유서부터 김 씨의 다섯 작품 중 네 작품에서 주연을 맡았다.

“제게는 극단 선배이면서 선생님이죠. 조언도 많이 해줍니다. 선배의 지적은 항상 옳고 정확해요. 무슨 말을 들어도 ‘아, 그렇구나’란 느낌을 받아요. 자기 확신이 없으면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는 거죠.”

김 씨의 작품에는 전형적인 인물이 일관되게 등장한다. 사회 비주류 하층민이지만 비타협적 정의를 추구하는 인물이다. 원전유서에선 ‘몽상가 타입의 혁명가’인 ‘남전’이고 풍찬노숙에선 차별에 대항해 혼혈족의 나라를 세우려는 ‘응보’다. 이 인물은 비주류인 연극을 통해 불합리한 세상을 질타하고자 하는 김 씨 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니 곧 이 인물들을 연기하는 윤 씨는 김 씨의 페르소나(예술적 분신)인 셈이다.

윤 씨도 이를 잘 알고 있다. “선배님은 글로 생각을 외치지만 그걸 더 멋들어지게, 더 쉽게 전달하는 것은 배우잖아요. 내가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고 있구나, 그냥 배우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지난해 김 씨가 쓰고 처음 연출도 한 연극 ‘판 엎고, 퉤!’는 아예 윤 씨가 연극 연출가로 등장한다. 김 씨는 처음부터 윤 씨를 주인공으로 세우려고 작정하고 쓴 작품이라고 했다. 돈이 없어 공연이 무산된 무대에서 연출가는 “밥이 감옥”이라는 사채업자의 독설에 “밥을 다 먹은 뒤 밥상을 뒤엎겠다”고 맞선다.

연극 자체를 다루는 이 연극은 같은 시기에 연극쟁이가 된 두 사람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도 담았다. 윤 씨는 “선배님은 처음 연출을 맡아 다 비워진 무대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데 화두를 뒀고, 제게는 ‘다 걷어낸, 전혀 꾸미지 않고 진솔하고 솔직담백한 연기를 해보자’는 화두를 던졌는데 서로 의기투합이 잘됐다”고 말했다.

평소 김 씨가 윤 씨에게 누누이 강조하는 점은 인문학적 소양을 쌓으라는 것이다. “제가 배우를 해봐서 알지만 배우가 연습하고 공연하는 일상에서 다른 일을 하기 어려워요. 그래도 훌륭한 배우가 되려면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야 합니다. ‘너는 기본기가 탄탄하니까 그것만 갖추면 완벽해질 수 있다’고 자주 그러죠.” 이 말에 윤 씨는 “100% 수용한다”고 화답했다. ‘판 엎고, 퉤!’ 할 때는 ‘체 게바라 평전’을 김 씨가 권해 읽었다고 했다.

두 사람이 함께할 다음 작품은 기약이 없다. 풍찬노숙을 끝낸 윤 씨는 밀양연극촌으로 들어가 4월 남미 콜롬비아에서 열리는 이베로 아메리카노 국제연극제에 초청된 연희단거리패의 ‘햄릿’ 연습에 들어간다. 지난해 남산예술센터 상주 극작가 계약 기간이 끝나 ‘자유인’이 된 김 씨는 영화, 뮤지컬 등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  
한형직 인턴기자 서울대 사회학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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