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서북부 길란 주에 자리 잡은 ‘마술레’는 천년의 역사를 지닌 전통마을이다. 천혜의 자연환경, 아랫집의 지붕이 윗집 마당이 되는 독특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이 마을에서 한국과 이란 예술가들이 한데 모여 대화하고 작업하는 ‘노마딕 예술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펼쳐졌다. 마술레(이란)=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아랫집 지붕이 윗집 마당이자 동네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다. 그 골목길을 따라 대장간, 빵 굽는 가게, 전통찻집이 늘어서 있다. 가파른 산기슭에 밀집한 목조주택은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계단으로 이어져 처음 온 사람은 자칫 길을 잃기 십상이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서북쪽으로 자동차로 6시간여를 달리면 인구 800여 명의 산골마을 마술레의 정겨운 풍경을 만나게 된다. 1006년에 세워진 마술레는 천혜의 자연과 독특한 문화유산이 어우러진 곳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전통마을이다. 길이 지붕으로 연결돼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외진 마을에 최근 활기가 흘러넘쳤다. 한국의 고승현 허강 전원길 류신정 유지숙 안정희 씨, 이란의 아흐마드 나달리안, 잠시드 하기아트 셰나스 씨 등 양국 예술가 12명이 11월 24일∼12월 1일 이곳에서 먹고 자며 창작하는 ‘이란 노마딕 예술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펼친 덕분이다. 작가들은 마을과 자연을 창작의 젖줄로 삼아 다채로운 현장작업을 선보였다.
○ 마을과 하나 되다
이곳 초등학교에 다니는 열두 살 동갑내기 알라헤, 마흐리에, 나디아는 단짝 친구다. 지난달 30일 오후, 소녀들은 작가들의 숙소를 찾아 고개를 빠끔히 들이밀었다. 이란의 전통현악기 세타르와 북을 연주하는 피루즈 아리만드 씨와 호흡을 맞추던 거문고 연주자 안정희 씨는 이들을 발견하고 반갑게 맞아들였다. “어제 한국작가들이 학교를 찾아가 물감 쓰는 법과 단소 부는 법을 가르쳐줬어요. 음악과 미술수업을 난생처음 받았다는데 재미있었는지 또 왔네요.” 어린 청중을 위해 두 사람은 ‘아리랑’과 이란 민요 ‘붓꽃’을 공들여 연주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유네스코 아태교육원, 이란 유네스코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이번 행사는 ‘그들만의 잔치’가 아니라 마을의 일상 속으로 스며든 소통의 축제란 점이 돋보였다.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등에 등장할 만큼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의 온기를 간직한 마을에서 열린 예술교류 프로그램. 작가들끼리는 물론이고 오가다 작품 제작을 구경하는 동네사람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린 현장이었다. 설치작가 류신정 씨는 “이란문화를 접하고 마을 분들과 만나면서 작업에 영감을 얻었다”며, 이란의 작가 부부는 “머나먼 한국에서 온 예술가들이 생각하는 것을 보고 배우며 우리의 우주는 더 커졌다”며 즐거워했다.
○ 자연과 하나 되다
작가들은 낮이면 산과 바다를 찾아 작업하고 밤엔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합숙을 마치고 숙소 앞마당에 그간의 작업을 발표하는 행사가 열린 1일 아침은 동네가 떠들썩했다. 이날 작가들은 한글과 페르시아문자를 소재로 공동 작업한 ‘마술레의 문’을 세웠다. 전통과 현대, 인간과 자연, 페르시아문명과 한국 전통의 만남 및 교류를 상징하는 문이었다. 차도르를 쓴 아주머니와 민박집 청년 등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누가 예술가인지 누가 관객인지 모를 만큼 하나가 된 사람들이 한데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내 집 지붕이 누군가의 마당이 되고, 길로 이어지는 마술레. 사람 냄새 나는 산골에서 작업하며 예술가들이 얻은 것은 ‘우리는 다 연결돼 있다’는 깨달음이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어디든 사람이 살아가고 생각하는 것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연결고리를 작업에 담고 싶다.”(유지숙)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되 다름을 넘어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잇는 길이 바로 예술에 있음을 깨우쳐준 노마딕 프로그램. 그 자체로 하나의 퍼포먼스였다.
▼ 자연에 의한, 자연을 위한 작품 ▼ 마술레서 만든 창작품, 수도 테헤란서 전시회
이란 서북부의 전통마을 마술레의 풀과 돌, 나무 등 자연이 수도 테헤란에 오롯이 옮겨왔다. 자연에서 보고 느낀 것을 현대적 조형언어로 풀어내는 한국과 이란의 작가들이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작업한 결과를 발표하는 전시가 3일 ‘이란 예술가의 집’에서 개막한 것이다.
이날 개막식엔 작가들과 사이다바디 이란 유네스코위원회 사무총장, 사르상니 예술가의 집 관장, 박재현 주이란대사, 최남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양국 교류를 상징하는 공동작품 ‘마술레의 문’을 중심으로 미술 작품과 연주를 선보였다.
숲에서 구한 나무둥치에 가야금 줄을 엮은 고승현 씨의 ‘백년의 소리-마술레’, 나뭇가지로 물고기 형태의 조형물을 제작한 허강 씨의 ‘꿈’, 카스피 해에서 발견한 병뚜껑과 노끈 등 잡동사니를 담은 전원길 씨의 사진연작은 이들이 충남 공주에서 펼쳐온 자연미술운동의 30년 내공을 엿보게 했다. 투박한 전통 거울에 현대적 공간의 미학을 접목한 작품(류신정), 마술레에 내리던 눈이 녹아 카펫 문양으로 변하는 이미지를 표현한 사진과 영상(유지숙)도 신선했다.
세계 각국에서 자연미술 작업을 해온 이란의 생태예술가 아흐마드 나달리안 씨는 돌에 상상 속 물고기를 새긴 뒤 이를 기록한 사진과 영상으로 자연의 메시지를 전했다. 잠시드 하기아트 셰나스 씨의 경우 전통찻집의 나무의자로 두 문화의 만남을 표현해 눈길을 끌었다. 이번 전시는 내년 2월 서울 아르코미술관에서도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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