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순간]조영남 “친일논란 세상 오해… 입닫고 귀열고 나를 채웠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8일 03시 00분


산전수전 조영남도 감당못한 필화

조영남도 비관할 때가 있다. 혼자 있을 때마다 ‘아, 이렇게 심심하게 살아야 하나’ 한다. 그렇다고 우울한 것은 아니다. 광대는 우울할 틈이 없다. 그의 서재에서 촬영했다.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조영남도 비관할 때가 있다. 혼자 있을 때마다 ‘아, 이렇게 심심하게 살아야 하나’ 한다. 그렇다고 우울한 것은 아니다. 광대는 우울할 틈이 없다. 그의 서재에서 촬영했다.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생각은 머릿속에 가득한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화기 저 너머에서는 “조영남 씨, 말씀하세요”라며 진행자가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방송사 후배가 해명의 기회를 주겠다며 어렵게 연결한 라디오 생방송. 말을 안 하려고 한 것이 아닌데 입 안의 침은 말라만 가고 혀는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내 생애 이렇게 경직된 적이 언제 또 있었을까…. 2005년 4월, 광대 조영남(66)은 세상 한가운데서 개처럼 두들겨 맞고 있었다. 자신의 책 제목처럼. 》
○ 매국노가 돼버린 광대

생각하면 멋있는 제목이었다. ‘맞아 죽을 각오로 쓴 100년 만의 친일(親日) 선언.’ 2005년은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사실상 식민지화한 을사늑약 100년, 광복 60년, 한일수교 40년을 맞는 해였다. 그 전해 연말에 기자, 친구, ‘측근’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기념할 만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듣고 보니 맞는 소리였다. 문제는 누가 쓰냐는 것. “형밖에 없소.” 그래서 썼다. 중앙일보에 글을 연재하고, 일본국제교류기금의 초청으로 7박 8일간 일본 곳곳을 둘러본 내용을 더해 책을 냈다.

“친일(親日)이라는 말이 원래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다’는 건데 매국(賣國) 비슷하게 돼버렸잖아요. 가든(garden)이 고깃집으로 바뀐 건 재미라도 있지만 이건 안 된다는 거죠. 원래 말뜻대로 하자, 친일이라는 말을 제자리에 갖다 놓자는 취지에서 친일 선언이라 했죠.”

사달이 난 건, 책이 일본어로 출간돼 일본을 방문했을 때였다. 신문, 잡지 등 10여 개 매체와의 인터뷰 일정을 30분 간격으로 소화했다. 그중 하나가 우익 성향의 산케이신문이었다. 주위에서는 “산케이는 안 된다”고 말렸지만 조영남은 “산케이건, 간케이건 뭐가 대수야. 언제까지 산케이를 피해야 해?”라며 인터뷰를 했다.

그의 호기로움에 뒤통수를 치듯 ‘조영남이 야스쿠니(靖國)신사에서 참배했다’, ‘조영남이 독도 문제 대응은 일본이 더 잘한다고 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사실과도 다르고 앞뒤 맥락을 뭉텅 빼먹은 엉터리 문장이었다. 이 기사는 국내에 전해졌고 여론과 인터넷은 들끓었다. 그해 3월 일본 시마네(島根) 현 의회가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이름)의 날’을 제정하면서 분출됐던 국민적 분노가 온전히 그에게 쏟아지는 듯했다. 한순간에 광대 조영남은 매국노가 됐다. 어이가 없었다.

사실 그의 인생은 어이없음의 연속이었다. 1970년 초, 와우아파트가 무너진 사고를 ‘신고산타령’에 붙여 노래했다가 군대에 끌려간 것도 어이없었고, 그 덕에 의식 있는 청년으로 부각된 것도 우스웠다. 육군본부에서 군 생활을 할 때,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각설이 타령’을 불러 젖혔다가 영창에 던져질 뻔한 일도 어이없음이었다. 딴에는 이 노래만큼 나라 사정을 정확하게 이야기한 노래가 어디 있겠느냐며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라고 읊었지만 대통령이 1년에 한 번 육군본부를 순시한다는 걸 어찌 알았겠는가.

그러나 도매금에 ‘죽일 놈’, ‘개××’ 소리를 듣게 된 이번 일은 강도가 남달랐다. 그는 “암담했다”고 했다.

○ 날 살린 친구들

집 앞에는 스포츠신문과 인터넷 매체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일절 만나지 않았다. 말도 하지 않았다. 일일이 답했다가는 일만 더 커질 것 같았다. “잘못한 일이 없으니 끝까지 대항해야 한다”던 지인도 있었지만 그런 ‘싸움’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10년 넘게 진행하던 TV 프로그램도 내놨고 신문과 잡지에 연재하던 글도 중단했다. 노래도 부르지 않았다. 스스로 감옥살이를 택했다. 그때 ‘아,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어야 하나. 한강에 투신해서 죽을까. 아니면 여기(청담동 자택)서 떨어지는 방법은 없을까 그랬지. 그런 게 심했어요.”

그해 이전 2년 동안 잇달아 스스로 세상을 등진 명사들이 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되기도 했다. 죽는 느낌이라는 게 뭔지를 알게 됐다. 순간적으로 절망상태에 빠지는 그 느낌. 그야말로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더할 수 없이 좋아하는 실존주의 철학에서 말하는 ‘출구 없음(no exit)’이 바로 이런 현실이라는 걸 절감했다. 장 폴 사르트르가 이야기한 ‘지옥은 바로 다른 사람들’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이 기회에 파리나 뉴욕에 가서 미술에 전념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한국인은 득실댈 것이었다. 암담함이 더 심해질 것 같았다.

유폐(幽閉)된 그를 끌어낸 것은 친구들이었다. 그가 사귀어놓은 사람들이 그를 살렸다. “알아, 내가 알아. 너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하는 전화가 여기저기서 지속적으로 왔다. 사람들이 그를 찾아 모여들었다. 집 근처 해장국을 잘하는 ‘새벽집’이나 ‘대나무숲’ 같은 식당의 조그만 방에 모여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세상이야기와 개똥철학을 나눴다.

이 모임은 이후 1년 반가량 지속됐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연락을 하고 모였다. 다들 자기 분야에서 성공했다는 말을 듣는 사람들이었다. 약간 과장을 보태면 약 500일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그는 출구를 찾아냈다. 과거 프랑스의 살롱이 이런 거 아니었을까 싶었다. 피카소의 친구들 같은 모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청담학교’라고 명명했다. 청담학교는 2006년 말 문을 닫았다. 마침 그의 은행잔액이 바닥을 쳤고, MBC는 그에게 라디오 방송진행을 제의했다. 폐교의 명분이 생긴 것이다. “이제 그만한다.”

“청담학교가 나를 성장시켰어. 얼굴 대 얼굴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납득시키는 그런 기술을 연마했고. 내 친구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가, 그런 걸 다 공부할 수 있었지. 내가 못 읽은 책을 100권, 1000권 읽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러면서 훨씬 (지식과 지혜가) 두터워졌다고 해야 하나.” 그 기간 400쪽이 넘는 책 3권을 쓴 건 덤이었다.

○ 경쾌한 회색분자

조영남은 또 어이없어했다. 지난달 한 TV 프로그램에서 걸그룹 ‘소녀시대’ 멤버 사이에 있다 벌어진 일 때문이다. 그로서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포옹이었다. 녹화를 끝낸 뒤의 마지막 인사였다. 그런데 다음 날 ‘그 일’이 한 인터넷 포털 검색어 순위 1위에 올랐다. ‘조영남 기습 키스.’ 컴퓨터를 아직도 쓸 줄 모르는 그는 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허탈했다. 해프닝에 불과한데 이 정도로 ‘거국적인’ 해프닝이 되는 건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했다. “아무거나 큰 이야깃거리가 되는 시대가 된 거예요. 젊은이도 늙은이도 살기 힘들고, 점점 더 사회가 옥죄어 오는 것 같아.”

그래서 그는 한국에 실망하고 미래를 비관하게 된 건 아닐까.

“실망의 반대지. 어이없는 일들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우리만의 우수성이 있어요. 추석 때 길 막힌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꿋꿋하게 고향으로 가잖아. 그런 속성을 나는 위대하게 봐요.” 길에서 경찰한테 대드는 ‘용기’, 새벽이건 언제이건 시도 때도 없이 끊이지 않고 올림픽대로를 오가는 차들을 그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함이라고 본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아우르는 그 묘한 어떤 것. 돌발성 혹은 예측불허, 그런 허무맹랑한 정신을 높게 산다.

어쩌면 이건 조영남의 삶을 관통하는 화두였을지도 모른다. 자유자재로 행동하는 여유로움.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어느 쪽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렇게 살아온 그는 어쩌면 ‘회색분자’다. 그러나 침울하고 기회주의적이지 않은, 경쾌한 회색분자다. 조영남, 그는 그런 사람이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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