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유치원 아이들이 익히는 정글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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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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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의는 아니지만 /구병모 지음/264쪽·1만1000원·자음과모음

잠에서 깨어보니 사람들의 구두코가 눈앞에 보인다. 맨홀에 빠진 것처럼 복부 아래 하반신이 땅속에서 굳어버린 남자. 그를 안에 넣고 굳어버린 정체 모를 금속은 그 성분도 모른다. 구조대가 와도 끄집어낼 수 없다. 왜 거리 한복판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됐는지, 그도 모른다. 전날 기억이 까맣게 지워졌기 때문. 사람들과 기자들이 몰려들어 화제가 되지만 정작 그를 빼낼 방도를 찾지 못하자 관심에서 멀어지고, 그는 점차 ‘괴물’로 변한다. 인분 냄새 등 온갖 악취가 그를 휘감고, 전염병이 우려되자 방역차가 달려오기도 한다.

단편 ‘타자의 탄생’은 자고 일어나니 커다란 벌레가 돼 있는 남자를 그린 카프카의 ‘변신’을 서울 한복판으로 가져온 듯하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남자는 하루아침에 기구한 상황에 놓인 시민이었다가 점점 사람들의 외면과 질타를 받는 처치 곤란한 존재로 변모한다. 호기심→동정→외면→혐오로 주위 시선이 변하는 것을 날카롭게 끄집어낸다. 모든 것을 포기한 남자는 외친다. “구멍은 어디에나 있어요.”

마법의 빵 얘기를 다룬 ‘위저드 베이커리’, 아가미가 있는 남자가 나오는 ‘아가미’ 등 이색적인 장편들을 펴낸 작가의 첫 소설집. 기발한 소재를 바탕으로 냉철한 각성을 끌어내는 필력이 돋보인다.

표제작 ‘고의는 아니지만’은 계층 격차, 사회 구조적 문제 등을 평범한 한 유치원의 일상을 통해 들춰낸다. 부모들의 소득 격차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 차이로 이어지고, 저소득층 아이들은 집에서도 유치원에서도 관심 밖으로 내몰리게 된다는 현실을 ‘블랙 코미디’ 필체로 그렸다. 특히 티 없이 밝게만 보이는 아이들이 사실 어른 못지않게 영악하고, 유치원에서부터 ‘정글의 법칙’을 익힌다는 시각이 날카롭다. ‘처럼’ 등 비유적인 표현을 금지한 도시 얘기를 그린 ‘마치…같은 이야기’,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세포를 꿰매 어떤 감정적, 지각적 반응도 일어나지 않게 된 남자 얘기를 다룬 ‘재봉틀 여인’ 등 모두 7편의 개성 강한 단편을 묶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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