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 福者 추대 시복식 현장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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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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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피’ 봉헌에 100만 순례자 “아멘”본보 이종훈 특파원 바티칸 르포

성직자도, 정치인도, 독재자도, 일반인도 그의 앞에서 모두 하나가 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를 교회가 공경할 복자(福者)로 선포하는 시복(諡福)식이 1일 오전 10시(한국 시간 오후 5시) 로마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2시간 50분 동안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주례로 봉헌됐다. 선종 6년 만에 복자로 추대되는 것은 가톨릭 역사상 가장 빠른 것이다.

이날 베네딕토 16세는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으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을 선언한다”며 “그는 인간이 교회의 길이고 그리스도가 인간의 길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과거의 역사를 초월하는 쇄신된 교회의 미래와 진정한 희망의 모습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교황청은 그동안 지하묘역에 안장됐던 요한 바오로 2세의 유해를 시복 미사가 끝난 뒤 성베드로 대성당 안에 있는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피에타 근처의 성세바스티아노 예배소에 안치했다.

○ 모두가 하나


시복식이 열린 이날 오전 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부터 순례객이 몰려들었다. 해가 뜨자 순식간에 광장 내 일반석이 모두 채워졌다. 100만 명이 넘는 순례객은 바티칸 주변의 광장과 길을 가득 메웠고 성베드로 광장에만 수만 명이 가득 찼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와 펠리페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 보르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폴란드 대통령, 알베르 2세 벨기에 국왕 부부,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 등 국가지도자급 귀빈 50여 명도 차례로 도착했다. 짐바브웨의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87)도 참석했다. 대량학살 등의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로부터 기소된 그는 유럽연합(EU)의 여행금지 제재를 받고 있지만 이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특별히 유예를 받았다. 오전 10시 10분경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차가 성베드로 광장에 들어서자 순례객들의 박수와 함성이 이어졌다. 10시 40분경 베네딕토 16세는 시복선언문 낭독을 마치고 앰풀에 담긴 요한 바오로 2세의 혈액을 제단에 봉헌했다. 이것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생전에 자가 수혈에 대비해 채혈됐던 것으로 냉동 상태로 보관 중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바치는 성가 ‘두려워 마라, 그리스도께 문을 열어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시복식을 마친 베네딕토 16세와 추기경들은 성베드로 성당으로 들어가 그의 관에 기도하고 입을 맞췄다.

○ 생전의 기적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 역사상 세 번째로 긴 27년간 재위하면서 전 세계를 104차례(129개국) 다니며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했다. 시복시성까지는 통상 수십 년이 걸리지만 베네딕토 16세는 세계 가톨릭계의 염원을 받아들여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해 5년 유예 기간 없이 선종 후 바로 시복 절차에 들어갔다.

그러나 복자로 추대되려면 업적 외에 병자를 치유하는 의학적 기적이 인정돼야 한다. 이번 시복의 근거가 된 기적은 프랑스의 마리 시몽 피에르 수녀의 증언이었다. 피에르 수녀는 4월 30일 밤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수만 명이 참석한 철야기도회에 직접 나와 10년 전 체험을 전했다. 피에르 수녀는 40세인 2001년 교황이 걸렸던 것과 같은 난치병인 파킨슨병을 진단받아 글씨를 쓸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는데 요한 바오로 2세에게 계속해 기도한 결과 교황 선종 두 달째이던 6월 2, 3일 몸이 낫는 기적을 경험했다는 것. 1월 베네딕토 16세는 피에르 수녀의 경험을 요한 바오로 2세의 기적으로 인정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또 교황청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 추대를 위한 의학적 기적 입증을 위해 270여 건의 사례를 조사하고 있다.

○ 시복식 전 과정 3D 다큐로 제작


시복식에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조국 폴란드에서만 10만여 명의 순례객이 왔다. 성베드로 광장과 산탄젤로 성을 잇는 콘칠리아치오네 거리(화해의 길) 등 주변 대로는 차량 통행이 전면 금지됐으며 수십만 명의 가톨릭 신자로 가득 찼다. 시복식 전 과정은 3D 입체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공개된다. BBC에 따르면 역대 교황 가운데 4분의 1 정도만이 성인으로 선포됐다.

한편 이명박 대통령은 1일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시복 축하 서한을 보내면서 “현재 교황청에서 심사 중인 ‘증거자 최양업 신부’와 ‘하느님의 종 124위’ 한국 순교자의 시복 절차에 대해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각별한 관심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 시복식(Beatification) ::

가톨릭에서 성덕이 높은 이가 선종하면 일정한 심사 절차를 거쳐 복자(福者·성인의 전 단계·blessed)로 추대하는 것을 말한다. 대개 선종 후 5년의 유예기간 뒤 생애와 저술, 연설에 대한 검토와 함께 의학적 판단이 포함된 심사에서 기적을 행한 것으로 판정되면 교황이 이를 최종 승인한다. 시복식에 이어 시성식을 거쳐 성인으로 추대된다. 순교자의 경우에는 목숨을 버리는 순교 행위 자체가 기적을 행한 것으로 인정된다. 후보자가 복자나 성인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조사하는 ‘악마의 변호인’ 제도가 있을 정도로 심사가 까다롭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
중세 교회재판-他종교 박해 등 사죄… 세계서 추앙


1920년 폴란드 공업도시 크라코프 부근 바도비체에서 퇴역 군인 출신 양복점 주인과 교사 부부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카롤 보이티와. 1946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1978년 비(非)이탈리아계로서는 455년 만에, 슬라브계로는 사상 첫 교황으로 선출됐다. 유대교 회당과 이슬람 모스크를 방문한 첫 교황이었으며 공산치하 고국 폴란드를 방문해 자유노조 운동에 불을 지폈다. 1981년 성베드로 광장에서 신자들을 알현하던 중 왼쪽 가슴에 터키인 청년이 쏜 총탄을 맞고 쓰러져 6시간에 걸쳐 대수술을 받았다. 사건 2년 후 교도소를 찾아 범인에게 “나는 이미 진정으로 당신을 용서했다”고 말했다.

1992년에는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중세 교회 재판이 잘못되었다며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2000년에는 다른 종교와 유대인에 대한 박해, 여성에 대한 억압, 인종차별, 아이들에게 가톨릭교회가 저지른 죄 등에 대해 용서를 구함으로써 종교를 초월해 세계인들로부터 추앙받았다.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은 1984년과 1989년 두 차례나 방한했다. 방한 당시 공항에서 “벗이 있어서 멀리서 찾아오니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한국말로 소감을 밝혀 모두를 놀라게 했고 선종 후 그가 한국어 발음기호를 적어놓은 경전이 발견되기도 했다. 파킨슨병의 합병증으로 고생하다 2005년 4월 27일 선종했다.

바티칸시티=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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