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14>모임에 속해 있어야만 하는 대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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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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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도 덜고 사랑도 받고 싶고… 우린 스터디 그룹이 필요해요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인간이 위대하다고?” 이렇게 인간의 과대망상증을 여지없이 파괴하며 우리에게 찾아온 학문이 바로 정신분석학이다. 정신분석학은 인간이 위대하기는커녕 다른 동물들에 비해 너무나도 열등한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인간이 미숙아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찰이다. 하긴 그렇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성장하여 독립하는 시간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인간의 성숙과 독립은 너무나도 느리기만 하다.

아프리카 초식동물의 새끼는 한두 시간 안에 걸을 수 있다. 물고기의 새끼는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유유히 물속을 헤엄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갓난아이가 언제 걷는지 생각해보라. 걸었다고 해도 집 바깥으로 홀로 돌아다닐 수 있으려면 또 몇 년이 지나야만 한다. 이처럼 인간은 갓난아이 때부터 부모의 애정 어린 보살핌이 없다면 하루라도 살기 어려운 존재다. 그렇지만 지나친 보살핌은 아이들에게 해로운 독이 될 수도 있다. 부모가 너무 많이 안아주는 아이들이 늦게 걸음마를 배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인 조건이 중첩되면서 지금 우리 부모들은 한두 명의 아이만을 낳아 키우고 있다. 당연히 아이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보살핌은 여러모로 지나친 데가 있다. 꿈에 그리던 대학생이 되어 거대한 대학 캠퍼스에 던져졌을 때, 우리 아이들이 느끼게 되는 두려움과 고립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정해진 교실도 없이 강의시간에 맞추어 강의실을 기러기처럼 이동해야만 한다. 이제 누구도 특별하게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는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한 것이다.

1980, 90년대에는 고독하고 불안한 신입생들에게 동아리(서클)나 학회가 자그마한 안식처 노릇을 했던 적도 있었다. 당시 동아리나 학회는 취미를 공유한 동호회 성격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사회 참여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물론 이는 당시 대학생들에게 취업이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지만 취업의 문이 현격하게 줄어들면서, 동아리나 학회는 과거 자신들이 누렸던 영향력을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고립감이란 불안의 문제에 취업이란 생계의 문제가 덧붙여졌다고나 할까. 2000년대 이후 대학 캠퍼스 내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다양한 스터디 그룹은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출현했다. 주로 국가고시, 자격증, 취업 준비, 유학 준비를 위한 스터디 그룹들은 지금도 캠퍼스 내 빈 강의실에서 혹은 캠퍼스 밖 카페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스터디 그룹에 대한 대학생들의 의식은 명료하다. 미래에 대한 꿈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끼리 모여서 꿈을 현실화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고 노력하자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면에는 작은 집단을 만들어 귀속감과 존재감을 확보하려는 무의식적인 욕망이 꿈틀대고 있는 것 아닐까? 프로이트(1856∼1939)가 에로스에서 집단심리☆의 본질을 찾았던 것도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애정관계―좀 더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감정적 유대―가 집단심리의 본질을 이룬다. (…) 첫째, 집단은 모종의 힘에 의해 묶여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것을 결속시키는 에로스의 힘보다 더 훌륭하게 이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 힘은 어디 있겠는가? 둘째, 개인이 집단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포기하고 다른 구성원들의 암시에 영향을 받는다면, 이것은 개인이 다른 구성원들과 대립하기보다는 그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라는―결국 개인은 그들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개성을 버리고 다른 구성원들의 암시를 받는다는―인상을 준다.

―‘집단심리학과 자아분석(Massenpsychologie und Ich-Analyse)’

집단심리를 분석하면서 프로이트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한다. 하나는 집단은 에로스의 힘에 묶여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집단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개성을 버리면서까지 구성원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옳다면 동호회라는 집단 활동이든 사회 참여적 집단 활동이든, 혹은 스터디 그룹 활동이든 간에 인간의 집단 활동은 타인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한 무의식적 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각 집단이 표방하는 슬로건은 아주 다를 것이다. “클래식 음악을 청취하고 그에 대해 의견을 나누자!” “참여 정신을 가지고 정치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하자!”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며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공부 모임을 만들어 각자가 원하는 꿈을 달성하도록 하자!”

그렇지만 상이한 세 가지 슬로건의 이면에는 사랑받고 싶다는 동일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클래식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나면 누구든지 클래식 모임에서 주목받을 수 있고, 날카로운 정세 분석이 가능하다면 누구든지 정치사회 모임에서 두드러질 수 있으며, 어학 능력이 탁월하고 유학 정보에 빠르면 누구든지 스터디 모임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은 ‘결여에 대한 의식’을 떠나서는 사유될 수 없다. 결여라고 느끼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것도 욕망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대학생들이 스터디 그룹을 구성하려는 욕망을 이해하려면, 그들이 도대체 무엇을 ‘결여’로 느끼고 있는지를 숙고할 필요가 당연히 있다. 대학 신입생이 되자마자 젊은이들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실감하게 된다. 이는 명문대학에 진학한 신입생들의 경우에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고등학교 시절 반에서 1, 2등을 다투면서 타인으로부터 주목받았던 삶을 살았던 그들에게 이제 더 이상 자신을 두드러지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 분명하다. 과거 자신을 빛나게 해주었던 매력이 이제 누구나 공유하는 평범한 것으로 전락한 셈이다.

사랑을 받을 때에만 인간은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를 발견하는 존재이다. 타인의 관심과 사랑이 배를 정박시키는 닻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 잃어버린 존재감을 되찾는 방법은 없을까? 바로 이런 무의식적인 동기에서 우리 젊은이들은 직접적인 인격적 대면이 가능한 소규모 집단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사랑받으려는 원초적인 욕망과 취업이라는 미래의 공포가 결합되는 순간 스터디 그룹은 대학생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오게 된다. 공부 모임을 통해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완화될 뿐만 아니라 참여하는 구성원들로부터 애정과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동시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스터디 그룹이 우리 젊은이들을 독립된 인격으로 성숙시키는 데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혹시 임시적으로 처방된 마취제나 진통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프로이트가 지나가듯이 던진 말에 주목하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개인은 그들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개성을 버리고 다른 구성원들의 암시를 받는다.” 프로이트도 집단 활동이 개인의 개성이 발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개성이 부정되는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던 것이다. 집단심리가 가진 이런 부정적인 결과는 이미 귀스타브 르봉(1841∼1931)☆☆이란 탁월한 사회심리학자에 의해 예견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집단을 이루는 개인에게서는 의식적인 인격이 사라지고 무의식적인 인격이 우위를 차지하며, 암시와 전염으로 말미암아 감정과 사고가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암시된 생각을 즉각 행동으로 옮기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것이 집단을 이루는 개인의 주요 특징이다. ―‘군중심리(La psychologie des foules)’

집단을 이루고 그 집단의 성원들로부터 사랑받으려는 욕망이 강해지는 순간,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집단이 표방하는 이념이나 대다수 성원들이 원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마치 자신도 평소에 원했던 것인 양 먼저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집단과는 다른 자신의 개성이 드러나는 것을 미리 방지하려는 전략인 셈이다. 그래서 집단 심리에 몰입될수록 우리의 개성은 개화되기는커녕 방치되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개성을 개화시킬 수 있는 집단 활동은 불가능한 것일까?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 젊은이들은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유아적인 욕망을 먼저 극복해야만 한다. 물론 유아적 욕망을 극복하려면 고독감과 불안감을 견딜 의지와 용기가 필요하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무엇인가를 능동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마침내 자신의 개성을 집단에서도 관철시킬 수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철학자·‘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 삶을 만나다’ 강신주 저자>
::집단심리(group psychology)☆::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일차적인 원리를 쾌락원리(Lustprinzip)라고 규정했다. 인간은 쾌감은 수용하고 불쾌함은 피한다는 원리다. 물론 이 경우 쾌감과 불쾌감은 인간 외부에서 온 것이다. 인간이 타자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감안하면, 개인에게 있어 자신이 속한 집단은 쾌감과 불쾌를 낳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집단심리는 집단 속의 개인이 겪는 심리적 변화를 말한다. 인간의 집단심리를 해명하려고 했던 프로이트나 르봉이 주목했던 것은 인간이 집단에 속할 때 지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이었다.

::귀스타브 르봉(Gustave Le Bon·1841∼1931)☆☆::

대도시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상대방에게 어떤 정서적 반응도 하지 않는다. 서로 무관심하고 냉담하며 자신의 속내를 감추는 지적인 대도시인들이 출현하면서 19세기 이후부터 지금까지 정치는 전혀 다른 외양을 띠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 익명의 도시인들, 자신의 사적인 일에 몰두하는 고독한 개인들을 모여들게 할 것인가? 다른 말로, 어떤 조건이 갖추어지면 익명의 도시인들이 정치적 군중으로 모여드는가? 사실 이것은 현대 정치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제에 답한 것이 바로 르봉과 그의 주저 ‘군중심리학(La Psychologie des foules)’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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