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동산의 거대한 저택을 30m 깊이의 무대 위에 형상화한 그리고리 지차트콥스키 연출의 ‘벚꽃동산’. 비스듬히 세운 겹겹의 버팀목은 다양한 인간군상의 동선의 축을 이루는 기둥이 됐다가 극 종반부에는 도끼질에 쓰러지는 벚꽃나무로 형상화된다. 사진 제공 예술의 전당
안톤 체호프 대표작 무대에 ‘벚꽃동산’상징 대형세트 인상적 러 연출가-한국배우 조화 미흡 원
작 깊은 맛 못살려 아쉬움
러시아 주요 도시에는 큰 극장을 뜻하는 ‘볼쇼이 극장’과 작은 극장을 뜻하는 ‘말리 극장’이 병존한다. 러시아의 고도(古都)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그렇게 불리는 두 극장이 있다.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탄생 150주년이자 한-러 수교 20주년을 맞은 올해 한국에서 그 두 극장을 대표하는 연출가의 체호프 연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무대에 올랐다.
5월 5∼8일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바냐 아저씨’는 말리 극장을 이끄는 레프 도진(66)의 작품이었다. 5월 28일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개막한 ‘벚꽃동산’은 볼쇼이 극장의 상임연출가 그리고리 지차트콥스키(51)의 작품이다.
전자는 도진이 20여 년간 키워온 말리 극장의 배우들이 출연했고, 후자는 지차트콥스키가 발탁해 6주간 호흡을 맞춘 한국 배우들이 출연했다. 게다가 도진이 세계적 반열에 오른 챔피언이라면 지차트콥스키는 그 아성을 넘보는 도전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연극계의 관심은 지차트콥스키의 작품 쪽에 쏠렸다. 그가 2004년 한국 배우들을 데리고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에 올린 체호프의 ‘갈매기’가 동아연극상 특별상, 올해의 연극상, ‘올해의 연극 베스트 3’을 휩쓸 정도로 인상적 무대를 펼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6월경 새로 출범할 국립극단의 외국인 예술감독 후보로 물망에 오른 점도 이를 부채질했다.
뚜껑을 열어본 결과 그의 무대는 과연 ‘볼쇼이’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그의 무대미술을 전담하는 에밀 카펠류시가 디자인한 목조무대는 세로로 30m 깊이까지 파고들었다. 무대 왼편으로 벚꽃동산의 대저택을 상징하는, 10개나 되는 창을 지닌 목조 구조물이 기차처럼 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무대 오른편은 개울이 흐르는 벚꽃동산의 야외공간을 깊은 공간감으로 형상화했다.
그러나 배우들의 연기는 그 깊이를 채우기에 역부족이었다. 배우들은 저마다 혼신의 노력을 다했지만 무대가 워낙 크다 보니 1층 객석 중간을 넘어서면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거대한 무대에 짓눌려 겉돈다는 느낌이 강했다.
‘벚꽃동산’은 체호프의 4대 장막극 중에서 차별성이 도드라지는 작품이다. 의사 출신인 체호프의 분신과 같은 의사(醫師) 캐릭터가 유일하게 등장하지 않고, 극을 끌고 가는 남녀 간 삼각구도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를 대신하는 것이 러시아를 상징하는 벚꽃동산이란 공간에서 펼쳐지는 과거, 현재, 미래의 역학구도다.
벚꽃동산의 주인인 라넵스카야 부인(이혜정)과 그의 오빠 가예프(이찬영)는 과거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의 농노 출신이지만 자수성가한 상인 로빠힌(장재호)은 현재를 대표한다. 벚꽃동산의 식객으로 만년 대학생인 뜨로피모프(박성민)와 그를 사랑하는 라넵스카야의 딸 아냐(이지혜)는 미래를 상징한다.
체호프는 셋 중 어느 하나의 손을 들기보다는 그 셋의 명암을 동등하게 담아낸다. 라넵스카야는 다정하지만 방탕하고, 로빠힌은 현실을 직시할 줄 알지만 남녀 문제엔 우유부단하다. 뜨로피모프와 아냐는 이상에 불타지만 몽상가적 기질이 다분하다. 많은 연출가가 그 암(暗)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달리 지차트콥스키는 명(明)에 방점을 찍었다. 라넵스카야를 40대 초반의 젊은 여인으로 설정한 것이 이를 대변한다.
문제는 그 밝음이 너무 강렬해 그를 받쳐줄 어둠이 발붙일 곳이 없어진 것이다. 그 결과 인물의 입체성이 살아나지 못했다. 무대는 깊은 공간감을 구축했는데 정작 그 속의 인물은 평면화되는 역설적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과거에 묶여 있는 늙은 하인 피르스(신구)만이 그 어둠을 지키며 극의 균형을 유지한다.
차진 연기로 소박한 무대를 꽉 채웠던 말리 극장의 ‘바냐 아저씨’와 비견하면 무대의 밀도 차가 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잘 훈련된 러시아 배우를 데리고 이뤄내는 작업과 달리 배우 발탁과 조련까지 책임져야 할 국립극단 예술감독 후보로선 더욱 아쉬운 점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3만∼6만 원. 13일까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02-58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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