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규장각 서고에서 잠자던 18세기 ‘파격 시인’이 세상으로 걸어 나왔다. 그 시인은 서명인(徐命寅·1728?∼1800?)으로 시집 ‘취사당연화록(取斯堂煙華錄)’은 영·정조 시대 한시(漢詩)의 정형을 파괴한 실험정신을 가득 담고 있다. 이 시집에는 18세 중반의 한시 연구를 새롭게 들여다봐야 할 정도로 파격적인 시 300여 편이 실려 있다.
성균관대 안대회 교수(한문학)는 최근 서명인의 한시를 연구한 ‘18세기 기궤첨신(奇詭尖新) 한시의 향방’이라는 논문을 12일 서울 이화여대에서 열리는 한국한문학회에서 발표한다. 안 교수는 “당시 한시가 4구나 8구로 정형을 이룬 데 비해 1구로 된 시를 짓고, 한자의 어순이 현대국어와 같은 데다 도시 풍경이나 연애를 소재로 삼은 것으로 보아 ‘18세기의 이상(李箱)’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 1구로 지은 시
‘天寒月委庭(천한월위정-하늘이 추워 달은 마당으로 내려오네).’
삭풍이 부는 추운 겨울, 잠자리에서 깨어 화장실을 다녀오다 푸르고 빛나는 밝은 달빛을 보고 남긴 한 구절의 짧은 시다. 서명인은 이 시의 제목을 ‘雪上風冷, 月色尤明, 如厠偶一句(설상풍랭 월색우명 여측우일구-눈 위에 바람이 차고 달빛은 더욱 환하다. 측간에 가다가 우연히 한 구를 얻었다)’로 붙여 제목과 본문의 내용을 연결했다. 측간(화장실)이라는 말을 시에 쓰는 것도 당시로선 파격이다.
무인 출신의 사대부가 비구니를 유혹하는 ‘남도사십해(南都事十解)’라는 5언 4구 10편의 작품에서도 독창성이 드러난다. 당시 유행한 가사(歌辭)문학의 하나인 ‘승가(僧歌)’를 소재로 삼았는데 화자를 비구니로 바꾸고 내용을 더했다.
시 제목을 짓는 데도 파격을 더했다. ‘꽃에서 놀다(화유·花遊)’와 ‘백마강 아래에서(백마강하·白馬江下)’는 어순이 오늘날 국어와 같다. 시집에 함께 실린 평에도 “만약 ‘유화(遊花)’로 하거나 상례대로 한 글자를 더해 ‘화하유(花下遊)’로 쓴다면 평범할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 초림체 한시의 핵심 인물로 추정
서명인은 서얼 출신 문인으로 부친 서종화(徐宗華)와 숙부인 서종해(徐宗海)는 영조 시대 저명한 학자였다. 이들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서성(徐성)의 후손이다.
서명인과 교류한 대표적인 시인들은 초림체(椒林體) 한시로 유명한 이봉환(李鳳煥)과 이명계(李明啓)다. 당시 서얼 문사들은 섬세한 묘사와 사회에 대한 울분을 담은 초림체 한시를 많이 지었는데, 이는 이후 백탑시파(원각사지 10층 석탑 인근에 살았던 북학파 시인)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박지원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안 교수는 “시풍이나 작품의 완성도를 볼 때 지금까지 알려진 이봉환 이명계보다 한 수 위인 초림체 한시의 핵심 인물로 추정된다”며 “이름이 모두 밝혀지지 않은 초림팔재사(椒林八才士)의 한 명일 가능성도 크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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